낙산사의 마지막 겨울, 23일 후

2005년 3월 13일, 그리고 4월 6일

등록 2005.04.12 20:07수정 2005.04.1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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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3월 13일 그리고 4월 6일의 홍예문

3월 13일 그리고 4월 6일의 홍예문 ⓒ 최백순

2005년 3월 13일. 때 아닌 봄눈이 흠뻑 내린 날 낙산사를 찾아가 아름다운 설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고찰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2005년 4월 6일. 다시 찾은 낙산사의 옛스러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식목일이던 5일 오전. 양양지역의 산불이 꺼졌다는 말을 듣고 멀리 태백의 검룡소를 찾아 길을 떠났다. 오후에 낙산사가 불탔다는 안타까운 소식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6일 아침 일찍 끼니를 거르고 달려간 그 곳에는 낙산사가 없었다.

a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 가는길의 소나무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 가는길의 소나무 ⓒ 최백순

오봉산 밑에서부터 매캐한 연기 내음이 코를 간질였고 입안에는 침만 고였다. 낙산비치 호텔을 오르는 길에는 전국에서 달려온 소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주차장을 점령했다.

헐레벌떡, 매표소를 지나니 시커멓게 타버린 숲과 잔해더미에서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는 휴게소, 다행이 의상 기념관과 다래헌은 마당의 잔디만 검게 그을렸다.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의상대는 울타리까지 그을음이 올라왔다. 홍련암을 바라보고 선 절벽의 나무는 검게 타버리고, 남은 솔잎은 누렇게 말라버렸다.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은 유난히 청색 기와가 반가웠다.

a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 ⓒ 최백순

주변의 대숲은 검게 타 버렸고, 스님들이 기거하던 요사채는 산산이 부서졌다. 여기 저기 흩어진 세간살이, 깨진 기와 조각에는 시주자들의 이름이 흩어졌다.

a 불탄 소방차

불탄 소방차 ⓒ 최백순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목탁 소리가 이어졌다. 천년 고찰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에 스님의 염불이 이어지고 3천배의 참회가 이어졌다.

불길을 견뎌낸 보타락과 보타전을 지나 원통보전을 향했다. 입구의 사천왕문은 건재했다. 불길이 원통보전 뒤쪽에서 몰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익은 건물들은 하나도 없었다.


왼쪽의 범종각 조계문 종무소였던 무이당, 주지스님의 거처인 고향실, 취숙헌 무설전 심검당… 없었다.

범종각을 받치고 섰던 화강암이 말라터진 가래떡처럼 부서져 있고 지옥 중생의 심금을 울렸을 범종은 바닥에 뒹굴었다.

보물 제 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이 있던 자리에는 비닐 테이프가 둘러쳐져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섰던 동종은 한 줌의 쇳조각으로 주저앉았다.


원통보전 앞의 보물 제 499호 7층 석탑은 불길에 여기저기 화상을 입고, 불자들의 참배를 받던 건칠관세음보살상은 화마를 피해 자리를 비우고, 타다만 나무와 깨진 기와조각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한참을 맴돌다 바라 본 해수관음상은 검게 타 버린 소나무 숲 사이에서 미소를 잃었다.

a 검게 그을린 소나무 사이에 선 해수관음상

검게 그을린 소나무 사이에 선 해수관음상 ⓒ 최백순

몇 해를 두고 오가던 길에 향긋한 솔내음은 사라지고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일제 강점기 송진 채취로 상처를 입었다던 소나무도 검게 타버렸다.

해수관음상 앞의 자그마한 전각도 타버리고 석등도 화마에 상처를 입었다. 그 앞의 공중사리탑도 불길이 닿았다.

발길을 돌려 TV 화면에서 불타던 홍예문을 향했다. 정말 없다. 돌로 쌓은 석축 위에 고풍을 자랑하던 홍예문은 흔적마저도 없다.

지난 3월 13일로부터 23일 뒤의 낙산사. 그 아름다웠던 설경은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

덧붙이는 글 | <영동매거진>에도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영동매거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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