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랜덤하우스
한국이 낳은 걸출한 세계적 음악가였으나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간첩 조작 사건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작곡가 윤이상과 <생의 한가운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루이제 린저가 나눈 대담을 정리해 책으로 엮은 <윤이상 상처입은 용>(랜덤하우스 중앙)이 나왔다.
1988년 한울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됐던 이 책은 윤이상 서거 10주기를 맞추어 금년에 발족한 윤이상평화재단의 설립 기념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철학, 음악, 역사,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아우르고 있는 루이저 린저는 때로는 윤이상의 마음을 편안히 어루만지는 질문으로 그의 의식의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어릴 적 기억을 불러들인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꼼꼼한 자료에 입각한 질문 앞에 그의 음악적 여정과 더불어 현대음악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들려주기도 하고 '동베를린 사건' 등 그의 정치적 수난을 더듬어 가기도 한다.
책은 루이제 린저의 서문에 이어 윤이상의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과 한국과 일본에서의 청춘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상처입은 용'의 태몽을 꾸고 태어나다
윤이상에게는 항상 '상처입은 용'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윤이상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날 적에 용꿈을 꾸었는데, 용은 그가 태어난 지리산 상공을 휘돌고 있었으나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까지 높이 차오르지는 못했다는 그의 태몽이야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 꿈을 윤이상에게 있어 심각하고 중대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윤이상은 이 꿈을 자신의 작품인 '첼로 협주곡'을 들어 설명한다. 도달하려고는 하지만 잘 올라가지 못하고 단념하고 마는 절대적 높이인 A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첼로가 자신의 운명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루이저 린저는 A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인생이 가진 아픔이라고 위로하면서 트럼펫이 가진 절대적 높이인 A음을 향하는 긴장이 윤이상이 가진 창조의 힘이 아닌가 되묻기도 한다.
그의 음악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
둘의 이야기는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이 지닌 의미, 아버지에 대한 추억, 바닷가에서 들은 어부들의 밤 뱃노래와 봄이 되면 들려오는 개구리의 합창, 유랑극단에서 들은 몽골의 현악기 호금과 거문고 악기 등의 소리, 학교에서 들은 오르간 소리 등은 그의 내면 깊이 잠겨있다가 훗날 그의 음악을 이루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음악 교육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윤이상은 통영 여자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거쳐 부산의 사범학교로 전근을 간다. 거기서 그는 동료교사였던 이수자를 만나게 되고 1950년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6·25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간 그는 서울시 문화상을 획득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쇤베르크 등 비인악파의 음악을 알고 싶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음악원에서 현대음악의 작곡 기법을 배우고 1년 뒤 베를린으로 가서 쇤베르크의 조수였던 루퍼와 블라허 밑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서독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 하기 강습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슈토크하우젠, 노노, 불레즈, 마데르나, 케이지 등과 교분을 갖게되며 그때 들었던 존 케이지의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었다고 회고한다.
1959년 윤이상은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12음 기법으로 쓴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해서 독일 언론의 호평을 받는다. 둘의 대담은 윤이상이 그 뒤에 발표했던 '바라' '낙양' '가사'와 '가락' '예악' '류퉁의 꿈' 등 수많은 작품들의 작곡 배경과 내용, 그의 음악의 소재였던 도교와 불교 등 동양적인 철학과 조선의 궁중음악, 작품에 등장하는 악기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상당한 인내를 갖고 읽어내야 했던 대목이다.
1967년 6월 17일 박 대통령의 개인 비서라는 사람한테서 아침 일찍 윤이상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그에게 보내는 박정희의 친서를 갖고 있다며 만나자는 남자의 말에 속아 호텔로 나간 그는 함부르크 공항을 통해 여권도 없이, 아무런 출국 검사도 거치지 않은 채 납치 당한다.
그는 곧장 KCIA(한국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그에게 올가미 씌워진 혐의는 베를린에서 반정부 정치활동을 하고 동베를린을 방문하며 북한과 접촉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한 것이라곤 북한을 한 번 방문했던 것과 당시 한국 민주주의 회복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던 것, 그리고 북한으로 간 어릴 적 친구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동베를린을 방문했던 것이 고작이었지만, 물고문과 구타 등 갖가지 고문을 당하며 간첩 혐의에 대한 자백을 강요받던 윤이상은 결국 "나는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자"라고 쓰고 만다.
나는 옥중에 있었지만, 마음까지 갇혀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해 12월 윤이상은 무기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독일과 국내에서 대내외적으로 압력과 항의를 행사한 결과 2심에서 무기형은 15년 징역으로 바뀌었고 1968년 12월 대통령 특별 사면의 형태로 석방되었다.
이러한 쓰라린 체험은 이후 윤이상의 작품세계에서도 반영되었으며 윤이상하면 그가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사실보다는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간첩 조작 사건을 먼저 떠올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윤이상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옥중에 있었지만, 마음까지 갇혀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그리고 가끔 나는 정말로 행복하기조차 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안에 떠오르는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밖에 있을 때보다 더욱 열심히 작곡에 몰입했던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을 가두어둘 수는 있지만, 끝내 굴복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작품이 <장자>의 '제물론' 편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나비의 미망인'이란 작품이었다. 한겨울의 감방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 전체가 부어오른 성치않은 몸으로 쓴 것이다. '나비의 미망인'이란 오페라는 윤이상이 투옥중이던 1969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이상은 투옥된 지 2년 반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세계의 여론에 그의 무고함을 호소하고 진실을 알리는 등 구명 운동을 펼친 전세계의 명망 있는 음악가들 덕분이었다.
다시 베를리으로 건너간 윤이상은 '나모', '첼로 협주곡', '요정의 사랑', '심청' 등을 작곡한다. 특히 석방되고 나서 4년 후 발표된 오페라 '심청'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도 그는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을 위한 3중주', 관악기, 하프, 타악기를 위한 '조화', 오보에,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 2중협주곡 '견우와 직녀 이야기',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적 환상 '무악',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공후'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정부의 준법서약과 사과요구로 귀국은 끝내 무산되다
1994년 한국 음악계는 대대적인 윤이상 음악축제를 기획하면서 선생의 귀국을 종용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초청편지에다 준법서약과 사과를 요구하는 바람에 그의 귀국은 무산되었다.
작곡을 가르치고 외국과의 교류나 남북간의 음악교류, 그 밖에 나의 오랜 소망은 남도창을 현대화 시키는 작업이다. 남도창은 훌륭한 성악예술이지만 그대로 계속하여 존속하고 있는 것도 퍽 따분하다. 유창하고 굴곡 있는 창법이 현대적으로 처리되면 아주 훌륭한 음악세계가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국악의 부류도 그렇다. 기악곡들의 새로운 가능성의 발굴은 더욱 풍부한 가능성과 음악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 따르는 악기개량도 필요하다.
당시 그가 <객석>이라는 잡지사에 보낸 편지의 몇 구절이다.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귀국을 학수고대했으며, 귀국해서 하고 싶었던 작업들이 많았던가를 보여준다.
그의 이상은 정치적 휴머니즘
그러나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윤이상 선생은 1995년 11월 이국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두 120여곡에 이르는 적지않은 작품을 발표했던 세계적 음악가였지만 그가 태어난 조국에서 그는 '상처받은 용'이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비극, 질병, 고문, 가치절하, 굴욕, 고독, 궁핍과 망명이 작곡가 윤이상의 생애를 관통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강팍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불신에 사로잡히거나 조소적이 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로부터 동시대 인류의 고통에 참여하고, 정치적 휴머니즘에 대한 이상을 얻게 되었다.
책 뒤표지에 쓰여진 베를린 페스티벌협회 회장인 울리히 에크하르트가 한 이 말은 아마도 인간 윤이상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인간 윤이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윤이상은 말한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길게 보면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이 지는 것이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엄숙하고 영원한 것이다”라고.
한 소설가와 음악가의 대담을 넘어서
이 책 <윤이상 상처입은 용>은 비록 대담 형식을 빌긴 했지만 자전적 전기라고 볼 수 있다. 루이제 린저는 반나치 활동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는 등 윤이상과 유사한 삶의 역정을 겪어온 윤이상의 독일인 친구이다.
친구인 루이제 린저가 던지는 깊이있고 날카로운 질문과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윤이상이 풀어내는 한국의 역사와 자신의 음악적 배경, 현대음악사와 동양철학, 세계관 등이 놀랍다.
윤이상평화재단 이름으로된 '모국어판 재출간에 부쳐'라는 글의 한 대목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한 소설가와 음악가의 대담을 넘어서는 명저가 아닌가 한다.
| | 윤이상 연보 | | | |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면에서 선비 출신의 부친 윤기현과 농가 출신의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20년 통영으로 이주.
1933년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함. 서울로 가서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제자인 한 바이올린 주자로부터 2년 동안 화성학 교육을 받음.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작곡과 음악이론, 첼로 등 수학.
1948~52년 통영여자고등학교, 부산사범학교,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
1950년 1월 30일 부산사범학교 국어교사 이수자와 결혼.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1월 첫딸 정 출생
1953년 종전 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여러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며 가곡, 실내악곡 등을 발표함
1956년 6월 프랑스로 유학해서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 오뱅이게서 작곡을, 피에르 르벨에게 음악 이론을 배움
1957년 7월 독일 베를린에 가서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음악이론은 슈바르츠-쉴링에게, 12음기법은 요제프 루퍼에게, 그리고 작곡은 보리스 블라허에게 배움
1959년 7월 서베를린 음악대학 졸업. 9월에 네델란드의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로 초연했고, 여기서 큰 성공을 거두어 유럽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함
1963년 퀼른으로 이주. 북한방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와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을 발표
1967년 6월 17일,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됨.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에 연류된 윤이상은 부인과 함께 기소되어 12월 13일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음.
1968년 67년 10월 교도소에서 작곡활동을 허락 받은 윤이상은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68)을 창작함.
1977~87년 베를린 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재직함.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상처받은 용』출판
1981년 5월8일 퀼른에서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가 서부독일 라디오방송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됨
1982년 8월 북한에서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됨. 그 후 북한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됨. 9월 제 7회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 개최.
1995년 5월 9일 분신자살을 한 학생을 위해 지은 교향시곡 『화염속의 천사』 및 『에필로그』를 일본에서 발표.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상 수상, 11월 3일 베를린에서 영면 / 안병기 | | | | |
윤이상, 상처 입은 용
윤이상.루이제 린저 지음,
알에이치코리아(RHK),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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