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지금 '앞치마 남편' 거센 바람

돈 벌어오는 아내와 집안일 하는 남편

등록 2005.04.13 21:09수정 2005.04.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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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가정에 혁명이 일고 있다.

TV나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에서 떠들썩하게 전해지는 바 없이,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혁명은 바로 남자 주부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돈지갑을 거머쥔 남편과 앞치마를 두른 아내라는 부부의 전통적 고정역할이 뒤집어지고 있는 것이다.

호주의 대표적 시사프로그램인 <60 Minutes>에서 최근 다룬 '살림하는 남편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이 프로그램에서 방송되는 내용은 돈 못 벌고 기죽은 남자들이 아내 눈치 보며 어쩔 수 없이 집안에 들어앉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 또한 당당한 직업을 가졌지만 수입이 더 많고 비전도 있는 아내와 의기투합해, 가정의 밝은 미래를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주부와 엄마'의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주인공들은 지금까지의 남녀 역할 고정관념에 비친다면 매우 독특한 사연을 가진 케이스들이다.


먼저 현 해군소령이자 함대 지휘자로서의 진급을 눈앞에 둔 전도양양한 아내를 살뜰히 보필하고 있는 한 남성의 사연은 이렇다.

남편은 근무 중 작전에 들어가면 배를 타고 바다생활을 하며 4~5개월 씩 집을 비우는 아내를 대신해 젖먹이 딸을 보살피며 알뜰히 살림을 한다. 그 덕에 아내는 호주 해군 최초의 자녀를 둔 기혼여성 직업군인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또 다른 케이스도 있다.

IT계통의 전문직에 종사하던 한 남성은 자기보다 돈 잘 버는 금융회사 간부인 아내를 대신해 10년 전부터 집에 눌러 앉기로 결심했다. 그는 요즘 3남매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고 한다.

반찬값을 아껴 아내 몰래 쌈짓돈을 만드는 남편, 생활비가 떨어졌다며 또 손을 벌리는 남편을 살림에 지장이 없는 한에선 슬그머니 눈감아 주는 아내.

역할을 바꾼 이들이 전하는 부부싸움 역시 재미있다. 또 그것 말고도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방송 사회자가 만약 타고 다니던 자전거 타이어에 펑크가 난다면 무슨 돈으로 수리를 하냐고 묻자, 남편은 "그 만한 돈은 재주껏 비축하고 있다"며 "그런 게 바로 살림의 묘미"라고 능청을 떨었다.

아내는 평소 알뜰히 살림하는 남편이 예뻐서 생활비에 보너스를 약간씩 더 준다고 한다. 그럼 남편은 그때마다 한푼 두푼 모아 비자금을 마련하는 것.

또 잡지사 데스크로 일하는 아내를 둔 한 남편은 아내의 회사 일로 집 전화벨이 울릴 땐 마음이 상한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끝날 줄 모르는 아내의 업무통화로 화가 난 나머지 제발 회사 일을 집까지 끌어들이지 말아달라며 아내에게 화를 내게 된다는 것.

남자 전업주부를 일컫는 별칭도 다양하다. 그들을 일컫는 단어는 'Mr. Mum', 'house husband', 'super dad'에서 심지어 'Kept man'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뀐 가정의 가장은 누구일까.

이점에 대해선 출연자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아내들은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있으니 당연히 ‘내가 가장’이라며 목청을 돋우지만, 살림하는 남편들도 '어림없는 소리'라고 맞받아친다.

남편들은 '집안 일 하고 아이 돌보고, 세금내고,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자신이 가장' 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밥벌이로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던 과거나 집에 들어앉아 살림을 하는 지금이나 '가장 자리'에 대한 미련은 여전한 것일까.

덧붙이는 글 | TV 리포트 세계의 TV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TV 리포트 세계의 TV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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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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