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현채 교수
이 통혁당 재건 기도사건에 연루된 '중정표 간첩' 가운데 하나가 고 박현채(1932 ~ 1995; 조선대) 교수였다.
물론 통혁당 재건 기도 같은 것은 없었다. 평소 임동규의 <농원>지 논지가 비판적이라 맘에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민중과 경제> <민족경제론> 등의 저술로 학생운동의 이론적 지주로 존경받고 있던 박현채를 가만 두어서는 안된다는 유신 충견들의 '우국충정'과 또한 간첩 검거 실적이 없으면 조직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공안기관 공무원들의 밥그릇 의식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급조된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주범 격인 임동규는 3월 13일에, 이어 박현채는 그 열흘 뒤쯤 연행되어 한 달 동안 인간이 고안해낼 수 있는 고문이란 고문은 모두 당한 뒤 중정이 만들어낸 가공의 소설이자 가공의 사건 주역과 조역으로 간첩이 되었다. 중정의 각본에 맞추느라 애꿎은 사람들만 수없이 피를 흘리고만 천인공노할 국가폭력의 인권유린 행위였다.
신문에 나지는 않았지만 박현채 교수에 대한 공소 사실은 후배인 '간첩' 임동규(현 민족무예 경당 관장)에게 불온한 학술서적 3권을 빌려주었고 '간첩' 임동규가 1978년 2월 "한국의 현시점에서 도시게릴라가 가능할까요?"라고 물었을 때 "안돼! 배겨날 수가 없어"라고 대답하고는 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불온한 학술서적 3권을 간첩에게 빌려주면 간첩이 되고 간첩이 무엇을 물어보았을 때 그것을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으면 간첩이 되다니 참으로 희한한 간첩도 많은 세월이었다.
박현채. 이제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1960년대부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청춘이 있었다면 박현채는 그 앞에 우뚝 선 거대한 산이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서는 평생을 살아남은 자의 채무감으로 민중과 민족을 위해 하루 24시간을 몽땅 바쳤던 사람이 박현채였다. 초등학교 때 벌써 독서회를 조직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던 사람이 그였다.
산에서 내려와 전주고등학교를 1년 다니고는 바로 서울상대에 합격했던 천재, 서울대학 교수를 할 수 있었는데도 전향서 비슷한 종이를 요구하자 미련 없이 교수직을 버렸던 단심의 소유자가 그였다.
민중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불사했던 사람, 그래서 하다못해 극우의 성향을 가진 곳에서도 원고청탁이 들어오면 두말없이 글을 썼던 사람이 그였다.
박정희의 독재는 잘못되었지만, 그러나 박정희가 경제를 일으키고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은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을 만큼 아주 폭넓게 사고하고 폭넓게 사람을 사귀었던 사람이 그였다.
그래서 아직도 그 이름을 부르면 눈을 감고 온갖 감회에 젖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그만큼 한국 현대사에 아주 굵고도 독보적인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