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파란만장한 기아체험(?) 이야기

때론 굶는 것 자체가 교육일 수도 있습니다

등록 2005.04.21 07:00수정 2005.04.2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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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 자식들이 배가 고파노니, 밥을 달라, 떡을 달라, 저그 어머니를 조르는듸 이런 가관이 없던가 보더라. 한놈이 나앉으며 "아이고, 어머니,아이고,어머니.배고파 나죽겠소,밥 좀 주오,밥 좀 주오." 또 한 놈이 나앉으며, "아이고, 어머니,나는 거 호박 시리떡 좀 하여주시오"


박봉술의 '흥보가' 중에서


흥보가에 보면 요렇코롬 흥보의 아들 아홉 형제가 육계장국, 영계탕, 생치구이, 어만두, 육만두, 두누산적, 우유차, 등등 먹고 싶은 음식 이름을 줄줄이 굴비 엮듯기 주워 섬기는 장면이 나온다(생치구이_꿩에 갖은 양념을 발라 구운 음식, 두누산적_두루산적, 우유차_옛날에 임금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먹던 죽의 일종).

우리 나라의 대표 빈민인 흥보의 궁핍한 삶이야 온 겨레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내 어린 시절의 가난도 그에 못지않았다.

"언제나 흰 쌀밥 한 번 고봉으로 배터지게 먹어볼꺼나!"

아마도 이 지구상에 인간이라는 종이 생겨난 이래로 밥 보다 더 심각하고 절실한 이데올로기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겨레의 5천년은 일종의 '집단적 허기증'에 걸려 허둥대던 궁기의 역사라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닐는지 모른다.


고려 말기 송도에 나타나 닥치는 대로 쇠를 먹어치웠다던 불가사리도 어쩌면 배고픈 백성들의 주체할 길 없었던 식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의 봄은 위장으로 부터 신호가 먼저 오는 걸로 시작됐다. 낮은 점점 길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이럴 때 무엇으로 텅빈 위장을 달랠 수 있더란 말인가.


우리 동네 아이들은 2월이면 아직 눈도 덜 녹은 산에 올라가 칡 뿌리를 캐어 혓바닥과 입술이 온통 자줏빛이 되도록 씹기도 하고 때로는 암칡을 돌확에 달달달 찧어 죽을 쒀 먹기도 하였다.

이윽고 봄이 거창한 식욕을 더불고 찾아들면 찔레꽃 순이며 칡 넝쿨,삐비, 송기(소나무 껍질) 등을 벗겨 먹기도 하다보면 어느덧 그 험하다는 보릿고개가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가버렸다.

여름과 가을에는 명감나무 열매, 정금나무 열매, 아그배나무 열매, 머루 등을 따먹고 더러는 잔대, 더덕 등을 캐먹기도 하면서 허기를 달랬다. 이렇게 살아왔던 '원시 채취 시대'에는 밥이란 일종의 희망이자 소원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밥이란 실제로 배가 부르도록 먹어본 적이 없는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토록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나는 밥을 봐도 거의 개 닭 쳐다보듯하는 깨끄름한 식욕을 가진 아이였다. 기아를 견디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셈이다. 나는 이 천부적인 위장의 조건을 이용하여 밥을 '전략 무기화' 할 줄 아는 천재성을 발휘하기도 헀다.

가령 고무신이 다 떨어져 가는데도 할머니가 영 신발을 사주실 기미가 안 보인다거나 바야흐로 설이 '개봉박두' 직전에 있건만 설빔을 마련해 줄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난 지체없이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이 난관을 뚫고 나갈 것인가. 일단 저녁을 굶기로 한다. 그렇게 되면 당황한 할머니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시느라 안절부절하신다. 왜 밥을 안 먹느냐?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그러나 난 끝까지 버티는 자만이 요구조건을 실현할 수 있다는 걸 뱃속에서 부터 깨우치고 나온 아이였다고나 할까.

한참을 묵묵부답으로 버티다가 슬그머니 요구조건을 내건다. 그러나 상대방의 요구를 일괄적으로 전부 수용해주는 협상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던가? 협상이 끝내 결렬되면 난 할머니 몰래 재거름과 퇴비가 쌓여있는 헛간으로 가서 '노숙자'의 고난을 자청한다.

먼저 지푸라기를 헛간 바닥에 깐 다음 할머니가 쉬 찾지 못하도록 벼 짚단들을 빙 둘러치고 잠을 청하는 것이다. 어린 나에게 있어 헛간이란 그야말로 공포의 상징이었다. 바로 몽달귀신이니 처녀귀신이니 하는 각종 귀신이 우글거리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산골의 밤은 부엉이 소리랄지 승냥이 울음 소리랄지 하는 온갖 소리들을 한 데 모아 공포를 '확대 재생산'해내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잔인한 밤을 견뎌야 하는 것이 생의 숙명이 아닌가. 우리네 생에는 목적을 위하여 견뎌야만 하는 공포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을.

내가 보이지 않으면 할머니는 온 동네 가가가호를 방문하여 나의 행방을 수소문하신다. 그러나 무궁화 꽃이 피기도 전에 헛간으로 숨어버린 손자 놈을 도대체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이윽고 공포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난 집안으로 슬슬 기어 들어가서 동정을 살핀다. 할머니가 그저 내가 나타난 것이 반가워서 이리 얼르고 저리 얼르면서 밥부터 먹을 것을 권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협상'이 완전 타결 되지 않는 한 숟가락을 든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치 않았다.

마음 약한 할머니가 먼저 '항복'을 선언하시고 내 요구조건을 수용할 것을 세계만방에 고하신다. 그러나 "밥아, 너 본 지 오래다!"라고 허겁지겁 수저를 들지않는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협상이 끝났다고 금세 밥을 먹는다는 것은 협상 상대(?)에게 얕잡아 보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번 협상은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헛간에서 이뤄진 나의 단식투쟁은 일년에 3~4 차례씩이나 됐으니 할머니의 고충이 오죽 자심했으랴.

안병기
어린 시절의 괴상한 '기아 체험'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단식'의 경험이 내게 인내심과 끈기를 배양해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아직도 세상의 변두리에서 인간 이하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흥부'들의 고달픔을 나의 고달픔으로 승화(?) 시키는데 기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간혹 있다.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닮는다고 한다. 우리들의 얼굴이 지난 결핍의 시대보다 얼마나 더 탐욕적으로 변해있는지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제 식욕과잉의 시대가 되었다. 나 어릴 적엔 밥 한 톨도 그냥 흘러 내보냈다간 당장 어른들에게서 벼락이 떨어지곤 했지만, 이제 세상은 변해버려 쌀과 밥은 이제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얘기를 들어보면 요즈음 아이들도 어린 시절의 나 못지않은 '뗑깡쟁이'들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엄청나게 실속을 차린다. 밥 먹고 간식 먹고 온갖 것 다 먹어가면서 엄마를 조른다. 요즘 아이들은 아무 고통없이 막무가내로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드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불로소득(?)을 노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생의 근본원리가 아닌가.

더 직설적 화법을 쓴다면 나는 굶는 것 자체가 교육이라고 믿는다는 얘기다. 비록 뗑깡일망정 배고픔을 통해서 인내심을 기르고 또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마음 안에 보듬을 줄 아는 넉넉한 품성을 기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한때는 내 생의 밀물이었다가 지금은 내 생의 썰물이 되어버린 봄날에 문득 더듬어 본 아련한 어린 시절. 쓸모 한 개도 없는 추억을 더듬어보니 내 지난 날이 결코 상실의 시기만은 아니었음을 스스로 긍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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