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선생님과 똑똑한 아이들

우리 반 똑순이, 윤미에게 주는 생일시

등록 2005.04.21 07:19수정 2005.04.2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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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윤미예요. ㅋㅋㅋㅋ
선생님이 생일 한 달 전부터 편지 쓰라고 했는데….
제가 회계시험 때문에 편지를 쓰지 못했어요….
사실은 언니가 시험 보기 전까지는 텔레비전이랑 컴퓨터를 못하게 했거든요….


오늘은 우리 반 '똑순이' 윤미의 생일입니다. 그동안 윤미와 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헤아려보니 단편소설 한 편 정도의 분량은 될 성싶습니다. 내용도 친구들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졸업 후 진로문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습니다. 윤미는 평소 활달하고 솔직한 성격이 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는데 엊그제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선생님…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너무나 많이 해요. 선생님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요. 애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좋긴 하지만요. 어쩔 때는 화를 내셔도 되는데… 선생님이 자꾸 그걸 참으시니까… 보고 있는 제가 더 화가 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이 저희들이 못할 때는 따끔하게 혼을 내셔도 되는데….'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러면 선생님도 편할 거고 우리들도 선생님이 무서우니까 잘할 텐데요. 하지만 그건 너무나 무식한 생각이었고요. 저도 선생님이 되면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대해볼까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그러면 제가 너무 힘이 들것 같아서 못할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 저는 과거에도 이런 비슷한 편지를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마치 연례행사라도 치르듯이 거의 해를 거르지 않고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전 일단 안심부터 합니다. '아, 화를 많이 내지는 않았구나!' '아, 많이 참았나 보구나!'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퇴근길에 한 남학생을 만났는데 그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 나왔습니다.

"선생님, 요즘 학급에 문제가 있나 보데요. 애들 잡아야죠."
"잡다니? 대화로 풀면 될 일을 잡긴 왜 잡어. 너부터 한 번 잡아보랴?"
"예? 아니요."

3월 한 달 동안 결석 한 명 없다가 4월이 되자 봄을 타는 아이들이 생기는지 학급 분위기가 두어 번 술렁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매를 대기보다는 대화로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이들 눈에는 답답하고 미련하게 보였나 봅니다. 그만큼 아이들도 모든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조급증과 일종의 폭력에 길들여져 있는 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 남학생이 우리 반 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아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 여자 친구인 수정(가명)이가 우리 반에 있기 때문이지요. 며칠 전에는 학교 근처에서 둘이 나란히 손을 잡고 가다가 학생부 선생님에게 걸려서 교무실 복도에서 기합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두 아이를 크게 혼내거나 꾸지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해주었지요.

"선생님은 대학시절에 사모님을 만났는데 사모님 덕분에 공부를 열심히 했어. 학점이 나쁘면 안 만나준다고 했거든. 불성실한 사람에게 자신의 장래를 맡길 수는 없다는 거였지. 너도 그렇게 해. 이 녀석 공부 못하면 만나주지 말란 말이야."


그때 빛나던 수정이의 눈빛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교무실 복도에 서 있다가 제 담임으로부터 꾸지람을 먹기는커녕, 어찌 보면 남자 친구와의 이성교제를 인정받는 셈이 되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만도 했지요.

교사나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자주 듣는 아이들에게서 성숙한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날 이후 수정이의 수업태도가 달라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거니와, 저를 바라보는 눈빛도 한결 당당하고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날 이후 저를 신뢰하고 고마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어떤 깊은 이야기를 해주어도 귀 기울이지 않던 아이가 180도 달라진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고 신뢰의 열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직은 불안한 구석이 있다하더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바로 진정한 교육이요, 교사 몫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제는 교무실에 늦도록 앉아 한 편의 시를 완성했습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시. 바로 우리 반 똑순이, 윤미에게 주는 생일 축하 시입니다.

너의 배꼽티의 기억

기억난다.
흥부전 극화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어.
어려운 영어대사를 열심히 외운 덕에
수업 구경하러 오신 선생님들 앞에서
우린 겁도 없이 영어로 마구 떠들어댔지.

그날 수업이 끝나갈 무렵이었어.
"여러분은 흥부가 좋아요, 놀부가 좋아요?"
넌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했지.
"놀부가 좋아요. 흥부는 멍청해서 싫어요."

그래서 그랬을까?
넌 내가 바보 같이 보일 때가 있다고.
가끔은 참지 말고 화도 내고 그러시라고.
솔직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내왔었지.

사실은 그 편지 받고
난 속으로 많이 기뻤단다.
아, 화를 많이 내지는 않았구나!
아, 많이 참았나 보구나!

기억난다.
지난 식목일, 우리 함께 산에 오르던 날
네가 입고 온 아슬아슬한 배꼽티
앞으로도 그렇게 당당하거라!
섹시하고, 우아하거라!

너는 주인이고, 나는 종이니
나를 딛고 일어나
다만,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거라.

2005년 4월 21일
사랑하는 윤미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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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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