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고택의 가묘(우)와 불천위 송준길을 모신 사당인 별묘(좌)안병기
지위나 인격을 나타내는 한자인 '격(格)'을 생각합니다. 언젠가 문살이 아름다운 절에 갔을 때였습니다. 절에 한 분밖에 계시지 않은 스님에게 그 절의 역사에 대해 물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적에는 자기 절의 역사를 모른다는 말을 할 적에는 적어도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스님은 그저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나도 잘 몰라요"라는 말을 던지고 돌아설 뿐이었습니다. 마침 그 스님 앞에는 스님의 식욕을 채워주려는 듯 인절미 한 보시기가 수북이 놓여 있었습니다.
절을 돌아서 나오면서 저는 '격'이라는 한자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저는 제아무리 아름다운 건축일지라도 그 집을 꿰차고 앉은 주인의 품위가 받쳐주지 않으면 기품을 잃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보물 209호인 이 동춘당의 품격을 지키는 것은 결국 동춘당 송준길의 선비정신이 아닐까요.
화려하고 사치스런 시류에 자신을 맡긴 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동춘당을 바라본다면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느낄 수 있겠지요. 당신도 역시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사람살이가 그렇게 매양 조심스러워서야 숨통이 막혀 어찌 살겠느냐고. 한번쯤 때 빼고 광내며 살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 아니겠느냐고 말입니다. 당신의 말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느끼는 공허감은 물질적 빈곤이나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삶의 지향점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나 자신조차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삶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언제 던져본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한 번쯤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지향점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춘당 건물이 가지고 있는 절제와 균제를 삶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조선의 선비 송준길이 낮은 굴뚝에서 보여준 타인의 삶에 대한 배려가, 더불어 살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 제가 경회루에 올라갔다 온 후에 쓴 글을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그 글의 마지막에 경회루에는 모두 48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사람도 일종의 건축물이라면 나라는 일물(一物)을 받치는 기둥은 몇 개나 될까. 내 삶을 지탱해주는 관계 혹은 기둥을 생각했다고 썼지요. 사람을 건축물에 비기자면 격을 지키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말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혹 당신도 저와같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봄날을 지나고 계신다면,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신다면, 언제 한 번 이곳 동춘당에 오십시요. 굳이 여기 오지 않아도 될 만큼 당신의 삶이 충일하길 바랄 뿐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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