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머리 천사, 지하철에 뜨다

여중생 혼내는 할아버지 말린 용감한 할머니

등록 2005.04.22 17:19수정 2005.04.2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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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하철 탈 때 웬만하면 노약자석 쪽으로 갑니다. 얌체짓 하려는 것은 아니고 노약자석 주변에는 기댈 곳이 많다는 것, 또 상대적으로 한가해 신문읽기가 편하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하철을 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들을 자세히 보게 됩니다.

연세가 연세인지라 대부분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주무시고, 간혹 안경 너머로 한자투성이의 고서를 읽으시는 분들을 보면 생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외양도 스타일리스트에서 노숙자 차림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공짜이고, 역마다 엘리베이터가 마련되어 있지만 지하철 타기가 여전히 버거울 정도의 연세가 드신 분들을 볼 때는 괜스레 마음이 짠해집니다. 제 직장 위치가 종각역인데, 요즘에는 탑골공원에 가시는 분들이 많은지 노인들이 어느 때보다도 활기찹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노약자석 쪽에 자리 잡고 무가지를 펼쳤습니다. 만화를 보고 혼자서 키득거리는데 맞은편 출입구에서도 앳된 여자들 웃음소리가 낭랑합니다. 여학생 둘이었는데, 교복 소매와 매무새가 펑퍼짐한 게 갓 중학교 1학년 학생임이 영락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MP3플레이어를 만지작거리며 서로 귀 한쪽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폼이 무척 친한 듯합니다.

교복 입기에는 아직 어려보이는 그 학생들이 조단조단 이야기하는 거며, 웃는 모습이 왜 그렇게 보기 좋았는지요. 체구가 왜소한 제 큰딸도 내년 이맘때면 저런 모습이려니 생각하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나이여서겠지만 성적에 찌든 학교생활에서 벗만큼 위안을 주는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평화는 채 1분도 안돼 깨졌습니다. 이야기에 혹은 음악에 취했는지 정거장 도착과 함께 출입문이 열리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따라서 두 학생은 승하차하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지하철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잠시 후 출입문이 닫히고 나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아주 무서운 얼굴로 두 학생을 크게 나무랍니다.

"아니, 사람이 타면 옆으로 비켜야 될 거 아냐. 뭐가 좋아 그렇게 히득거리는 거야. 쪼그만 것들이……!"

그 할아버지 호통으로 다소 어수선했던 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고요. 할아버지의 호통은 계속 되었습니다. 차마 여기에 옮기지 못할 정도의 막말이었습니다.

두 여학생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죄송하단 말도 못하고 눈물만 그렁거린 채 밑만 바라봤습니다. 할아버지의 꾸지람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전에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해 화풀이를 하는 듯싶기까지 했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욱하고 올라오더군요. 사소한 잘못에 지나치게 꾸짖고 욕까지 하는 할아버지와 어쩔 줄 몰라 하는 여학생의 얼굴. 둘 다 얼굴이 빨갰으나 너무나 큰 차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말려야겠다는 건 생각뿐. 저는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그치겠지, 하는 마음 속에는 괜히 끼었다가 저 불 같은 성격의 할아버지와 필히 발생하게 될 후환의 '귀차니즘'이 자리 잡았겠지요.

그렇지만 언제까지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요. 신문을 선반에 올려놓고 심호흡 한 번 하고 나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짧은 거리인데 오만가지 생각이 듭니다. '어떤 말을 해야 좋게 해결할까. 자세는 어떻게 할까.'

몇 걸음 옮겼을까, 누군가가 제 발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쇼트커트의 하얀 머리가 눈이 부신 할머니였습니다. 그 분은 저보다 앞서서 아직도 호통치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으로 등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이제 그만 좀 하슈. 아직 어린이인데, 쟤들이 뭔 잘못을 했다구. 그리 야멸차게 말하누."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제 귓전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좀 과장하면 가슴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자칫 할머니가 당할 해코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행동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하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순한 양이 되어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바라봤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거리를 확인한 후 그 학생들에게 다가갑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계속 재미있게 지내고, 둘이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

할아버지에게 했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눈물이 맺힌 한 학생의 어깨를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두 학생은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할머니 손이 학생들 팔을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얼마 후 다음 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흐릅니다. 저는 할머니가 내릴 줄 모른다는 생각에 잽싸게 할머니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할머니를 와락 껴안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나오는 바람에 얼굴조차 못 본 것입니다. 문이 열리면서 할머니와 학생들은 같이 내렸습니다. 까치발을 하고 얼굴만이라도 보려고 했으나 어림없습니다.

차창 밖에는 두 학생에게 뭔가를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할머니 뒷모습만 보입니다. 여전히 할머니는 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아! 내리고 싶은 강한 유혹이 들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신문을 펼쳤지만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어느새 자리를 잡았는지 앉아서는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이 짐짓 눈을 감고 계십니다. 건성으로 신문을 넘기자 만화가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재미없는 작가였는데 오늘따라 무지 웃깁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일을 접할 때는 저희 회사 구조조정이 한창이었습니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 힘든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다만, 할머니 같은 따사로운 분들이 있어 저를 기쁘게 합니다. 할머니 얼굴만이라도 뵈었으면….

덧붙이는 글 이 일을 접할 때는 저희 회사 구조조정이 한창이었습니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 힘든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다만, 할머니 같은 따사로운 분들이 있어 저를 기쁘게 합니다. 할머니 얼굴만이라도 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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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는 질서보다 우선한다"는 홍세화님의 글을 좋아하는 회사원입니다. "모근 국민이 기자"라는 오마이뉴스의 모토에 공감하면서도 글을 쓴다는 것, 더구나 남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알기에 기자로 등록하기가 망설여집니다. 되도록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변잡기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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