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시인의 꽃이야기, 세상이야기

<김해화의 꽃편지>를 읽고

등록 2005.04.23 14:56수정 2005.04.2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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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해화의 꽃편지

김해화의 꽃편지 ⓒ 안준철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세상을 향해 한 통의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그냥 편지가 아니라 꽃 편지이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사진기에 담아온 들꽃에 이런 저런 사연을 입혀 지인들에게 띄워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곤한 잠에 빠져 있어야 할 새벽에 일어나 편지를 쓰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공사장에서 철골을 엮는 현장 노동자 시인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서서 견뎌야지
철근을 세우다가 철근에게 속삭인다
하루 철근 메고 났더니 어깨가 내려앉은 모양이야
너무 아프고 무거워 내려놓고 싶어
철근은 말이 없다 안다
얼마나 단단해져야 말을 잃고
온몸으로 부딪쳐 말금하게 울음을 우는지
나는 아직 멀었다

- 시 '나는 아직 멀었다' 모두



사진기나 컴퓨터에 들어 있는 들꽃들을 꺼내어 꽃을 소개하는 글과 함께 시나 편지를 써서 꽃편지 카페(cafe.daum.net/kimhaehwa)에 올리고, 그것을 다시 천여명에 달하는 꽃편지 식구들의 이메일 주소로 일일이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두 시간. 비가 오거나 일이 없어 공치는 날이 아니라면, 아침 7시 반까지는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 그로서는 아침 시간이 빠듯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그는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더욱이 철근노동자라면 노동의 강도가 결코 만만치 않을 터인데. 이팔청춘도 아니고 '어느 새 노가다살이 이십년이 훌쩍 지나 머잖아 흘러흘러 삼십 년을 돌아보게 될' 나이가 아닌가. 그는 최근에 출간한 네 번째 시집 <김해화의 꽃편지>(삶이 보이는 창) 책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전라도에서 강원도까지 방방곡곡을 흘러 다니던 6년 동안의 떠돌이 노동자 생활을 접고, 고향에서 주암댐 공사장 일을 하면서부터 동생이 가져다준 조그만 올림푸스 하프사이즈 필름 사진기를 들고 댐이 막히면 물에 가라앉을 마을들의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찍으면서 시작된 들꽃사진도 이십년이 되었습니다.

a 김해화의 꽃편지 -얼레지

김해화의 꽃편지 -얼레지 ⓒ 안준철

남의 집을 짓느라 먼지 속을 떠돌면서도 정작 자기 집은 짓지 못하는 것이 철근 노동자들이 겪는 암담하고 쓰라린 현실이다. '아이엠에프 이후로 철근쟁이 벌이도 시원치 않아서 지난해 연봉(?)이 천사오백만원쯤' 되다보니 작은 집 한 채 마련하는 것이 소원인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래서일까? 시집 책머리에는 '아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내가 사진기를 들고 꽃을 찾아다닌 그 이십 년 동안 내 곁에는 가난한 노동자를 만나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저질러서 산 사진기나 렌즈들의 월부 돈을 분노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면서도 한 달로 거르지 않고 내주었던 아내에게 나는 너무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가장을 먹여 살리느라' 시인의 아내는 뒤늦게 한문학원을 차려서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부부란 살다보면 서로를 닮아가는 걸까? '돈도 되지 않는 시와 지금도 여전히 돈만 잡아먹는 사진'에 정신이 팔려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남편이 늘 못마땅해 하면서도 어느덧 반 시인이 되고 말았다.

a 김해화의 꽃편지-풍접초

김해화의 꽃편지-풍접초 ⓒ 안준철

순천 아랫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갔는데
난장 바닥 한 바퀴 휘돌아
생선 오천 원 조갯살 오천 원
도사리 배추 천 원
장짐 내가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 가다 돌아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 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기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 시 '아내의 봄비' 모두


학교에서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조사하다보면 부모 직업란에 '노가다'라고 적은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때마다 나는 '노가다'라고 쓴 것을 '노동자'라고 고쳐주면서 이런 말을 해주곤 한다.

"너 학교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 집에서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잠도 자고 그러지? 그런데 만약 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학교가 파했는데 돌아갈 곳이 없다면 말이야. 편하게 쉬고 가족들끼리 대화도 나누고 할 집이 없다면 참 불편하고 불행하기도 할 거야. 그런데 그런 집을 짓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대통령은 한 사람이면 족하지만 집을 짓는 분들은 훨씬 더 많이 필요한데 모든 사람이 다 대통령이 되고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니? 너의 아버지는 귀한 일을 하고 계시는 거야."

이런 말을 해주면 아이들의 표정은 두 가지로 갈린다. 자신의 부모의 직업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쪽으로 마음을 고친 그런 표정을 짓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게 귀하고 훌륭한 직업이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외려 반문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도 있다. 그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a 김해화의 꽃편지-상사화

김해화의 꽃편지-상사화 ⓒ 안준철

<김해화의 꽃편지>에서 만난 시편들 중에도 꽃편지라는 제목이 무색한 정도로 진한 어둠이 느껴지는 시들이 있다. 사진 속의 꽃의 배경도 시인의 현실인식을 반영하는 듯 어둠침침하다. 그것이 좀 이상했는지 평소 시인을 잘 아는 한 지인이 꽃편지 카페에 글을 남긴 모양이다.

청주 사는 김창규 시인이 꽃편지 뒤에 꼬리말을 달았습니다.

"요즘 꽃 사진, 어두운 배경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표현 기술은
좋은데 배경도 살려주세요, 민초들이 좋아하거든요."

형님
꽃빛이 세상보다 환해서 그렇습니다
어두운 세상이 구름에 덮여서 그렇습니다
내가 숲그늘에 들어 숨을 죽이니 더 그렇습니다

- 시 '세상보다 환해서-김창규 시인께' 모두


<김해화의 꽃편지>에는 시와 편지 그리고 꽃사진이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꽃이다. 일부러 시와 편지를 구별하지 않고 함께 묶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한다.

그는 책머리에서 '들꽃들에게 이렇게 다 늦어서야 집 한 채를 마련해줍니다. 이 책은 나의 문학이 아니라 순전히 그동안 내가 만났던 들꽃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a 김해화의 꽃편지-흰물봉선

김해화의 꽃편지-흰물봉선 ⓒ 안준철

하지만 그는 천상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만약 시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거꾸로 이 세상에 김해화라는 시인이 없었다면 시의 한 구석이 허전할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시는 어둡지만, 어둡기 때문에 하얀 길이 드러나기도 한다. 마치 '핏빛 삶 한가운데' 핀 '눈부신 흰 물봉선 한 포기'처럼. '세상 저물어 상처 다 아물도록 서 있다가/새벽 오면 삶을 수액을 끌어올려/꽃 한송이 피우'는 '선암매'처럼.

자주 물봉선 핏빛으로 선연한 골짝
내 사는 일도 그러하였습니다

핏빛 삶 한 가운데 눈부신 흰 물봉선 한 포기
지금
당신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 시 '흰 물봉선' 모두



a 김해화의 꽃편지-선암매

김해화의 꽃편지-선암매 ⓒ 안준철

그동안 무성해진 그리움도 잘라내고
제법 굵어
그늘지는 사랑도 잘라내자

여기저기 돋아나는
새순 같은 이름까지 잘라내 피 흘리고 나면
아픔에도 많이 무디어지리

세상 저물어 상처 다 아물도록 서 있다가
새벽 오면 삶의 수액을 끌어올려
꽃 한송이 피우고 싶다

당신 한 사람
환하게
갖고 싶다

- 시 '선암매' 모두


매일 같이 누군가를 위해 새벽잠을 설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하지만 오늘도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사진기에 담아온 들꽃들을 불러내어 한 번 더 말을 걸어보고, 시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띄웠으리라.

'손을 잡고 같이 갈 수 없고/ 서로 이름 불러주며 가까이 갈 수 없지만/ 앞서 가거나 뒤따라오거나/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을 당신'을 생각하면서.

길을 갑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지도에 그려진 같은 길을 가지만
그러다가 길에서 만나 동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내가 길 떠나는 시각과 당신이 길 떠나는 시각이 다르니
우리는 같은 길을 가면서도
서로 다른 풍경과 다른 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거라고
믿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손을 잡고 같이 갈 수 없고
서로 이름 불러주며 가까이 갈 수 없지만
앞서 가거나 아니면 뒤따라 오거나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을 당신

그 믿음만으로도
새벽길을 떠나면서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 '새벽에 쓰는 편지' 모두


<김해화의 꽃편지>를 덮으면서 물신 세상을 향한 그의 분노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앞날이 꽃길처럼 환해지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덧붙이는 글 | 김해화 시인은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시여, 무기여>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인부수첩>(실천문학사), <우리들의 사랑가>(창작과 비평사), <누워서 부르는 사랑노래>(실천문학사)를 펴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 일과 시 동인입니다. 1981년부터 지금까지 공사장 철근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986년부터 일하는 틈틈이 전남 동부지역의 산과 들에서 들꽃사진을 찍으면서 다음카페<시와 사랑, 우리꽃을 찾아서(http://cafe.daum.net/kimhaehwa)>를 통해 회원들에게 김해화의 꽃편지를 띄우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김해화 시인은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시여, 무기여>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인부수첩>(실천문학사), <우리들의 사랑가>(창작과 비평사), <누워서 부르는 사랑노래>(실천문학사)를 펴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면 일과 시 동인입니다. 1981년부터 지금까지 공사장 철근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986년부터 일하는 틈틈이 전남 동부지역의 산과 들에서 들꽃사진을 찍으면서 다음카페<시와 사랑, 우리꽃을 찾아서(http://cafe.daum.net/kimhaehwa)>를 통해 회원들에게 김해화의 꽃편지를 띄우고 있습니다.

김해화의 꽃편지

김해화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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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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