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태리 선산에서 묘를 이전하면서 문중이 세웠다는 시비. 홍랑의 묘 앞에 세운 이 시비는 앞면에 홍랑의 시가 있고 뒷면은 고죽의 시가 새겨져 있다.한성희
1573년 고죽이 함경도에 북해평사로 부임해 홍랑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홍랑은 1574년 고죽을 영흥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함관령에서 그 유명한 시조를 남긴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이듬해 고죽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자 함경도에서 7박8일을 걸어 상경해 고죽을 만나고 돌아간다. 때마침 명종비 인순왕후의 국상 중이라 고죽은 그 일로 인해 파직당하고 1년 동안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함경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경계를 벗어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고 해요. 그런데 홍랑 할머니는 허락도 받지 않고 기생의 몸으로 사대부를 찾아왔으니 고죽 할아버지가 파직당하신 거지요."
최경창의 후손인 최은호씨(파주시 교하읍)의 말이다.
아녀자의 몸으로 먼길을 걸어와 상경해 만난 지 7년 후 1582년 최경창은 다시 함경도로 부임했고 이듬해 선조로부터 성균관직강을 제수 받아 상경 중 객관에서 45세로 죽는다. 이때 홍랑은 고죽의 운구를 따라와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에 있는 묘소에서 삼년 간 시묘살이를 한다.
"홍랑 할머니가요. 임진왜란 때 고죽 할아버지가 쓰신 책을 보따리 싸서 짊어지고 피난다녀 책을 무사히 보관했다고 해요."
그 후 고죽의 무덤 앞에서 자결한 홍랑의 정절을 높이산 최씨 문중은 홍랑이 죽은 자리에 홍랑을 묻고 지금까지 후손들은 제사를 모셔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