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04) 텃밭을 갈고서

등록 2005.04.26 21:20수정 2005.04.2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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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해외 동포여러분! 고국의 흙냄새를 맡으세요.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해외 동포여러분! 고국의 흙냄새를 맡으세요.박도
멧새들의 합창


이른 아침 멧새들의 요란한 합창에 잠이 깼다.

강원 산골의 봄은 늦다. 아직도 아침저녁에는 살얼음이 얼 정도로 날씨가 쌀쌀하다. 두 달 동안 집을 비워둔 데다가 묵은 짐까지 퍼질러놓아서 집 안팎이 어수선하기 그지없지만 겨우내 묵힌 밭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씨앗을 뿌리지 않고서 어찌 푸성귀나 열매를 얻을 수 있으랴.

집 밖으로 나가자 벌써 앞 집 노씨는 밭에 나와서 밭갈이 준비로 퇴비를 내고 있었다. 건너편 실미경로당 노인회장 네도 밭에다가 거름을 내면서 한편에는 소로 쟁기질을 하였다.

산책 겸 건너편 밭에 가서 쟁기질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날에는 소가 쟁기질하는 걸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트랙터가 그 일을 대신 하기에 점차 보기가 힘든 장면일 것 같다. 주인은 그 밭에다가 고추를 심는다고 했다.

밭의 흙을 한 줌 쥐자 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이 흙을 한 움큼 담아다가 해외 동포에게 보내고 싶다. 그러면 그분들이 고국의 흙냄새를 맡으면서 얼마나 좋아들 하실까?


농사꾼 박용선(75) 씨가 익숙한 솜씨로 쟁기질을 하고 있다
농사꾼 박용선(75) 씨가 익숙한 솜씨로 쟁기질을 하고 있다박도
잠깐 새 트랙터 기사가 노씨네 밭에 도착하여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뿜으면서 밭을 갈아엎었다. 노씨네 밭은 1800여 평으로 소로 쟁기질을 하면 대엿새 정도 갈아야 하는데, 트랙터로 갈면 한나절은커녕 두어 시간이면 다 끝내준다고 했다. 트랙터 기사는 장터 사람으로 요즘이 대목이라 한창 바쁘다고 했다.

노씨는 “농사꾼은 품삯을 뜯어먹고 사는 건데, 이즈음 농사는 죄다 기계나 남의 손을 빌려서 일하기에 이전보다 영농비가 훨씬 더 많이 든다”고 하면서, 이제까지 거름 값과 씨앗 값 등 180만원이 들어갔는데, 앞으로도 영농비가 3백~4백만 원 정도 더 들어갈 거라고 했다. “올 여름 배추 팔아서 돈 천만 원은 손에 쥐어야 타산이 맞을 텐데 그때 시세가 어떨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올 배추농사는 농협계약 재배를 할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계약 재배는 이윤이 적지만 대신 풍작일 경우, 밭을 갈아엎는 위험 부담은 줄어든다고 했다. 농사꾼들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작물 선택을 잘못하면 과잉 생산으로 인건비는커녕 씨앗 값도 건지지 못하기 일쑤라서 농사마저도 투기화하고 있다고, 정부에서 적정 이윤이 보장된 농정(農政)을 펼치면 이농 현상도 줄어들 거라고 했다.

트랙터가 굉음을 내면서 눈 깜짝할 새 산골 배추밭을 갈아엎었다
트랙터가 굉음을 내면서 눈 깜짝할 새 산골 배추밭을 갈아엎었다박도
욕심을 줄이다

정말 눈 깜짝할 새 트랙터는 그 넓은 밭을 다 갈고 두둑까지 만들었다. 이참에 내 집 텃밭도 갈아줘야겠다. 노씨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내 집 텃밭을 갈아주겠다고 하여, 이미 부탁을 드린 바 있었다.

올해 나는 텃밭의 절반 이상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 뒷산 주인이 바뀔 때 측량한 결과, 내 집 텃밭 절반 이상이 뒷산 주인 터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해는 얼치기 농사꾼이 200여 평의 텃밭을 가꾼다고 혼났다. 올해는 다리마저 시원치 않아서 애초부터 조금만 지을 작정이었다. 트랙터가 두어 번 지나자 두둑까지 만들어졌다. 10분도 채 안 걸렸다. 내가 괭이질로 갈아엎는다면 한 이틀은 걸렸을 테고, 그런 뒤 몸살로 하루는 앓았을 것이다.

지난날에는 모를 내거나 추수할 때는 온 들판이 사람들로 붐볐는데 지금은 모내기철에는 이앙기 몇 대가 들판을 누비고, 추수 때는 콤바인이 황금 들판을 누빌 뿐이다.

그동안 사람이 하던 일을 이제는 거의 대부분 기계가 다 하고 있으니, 사람이 필요 없거나 값이 떨어지고 일자리마저 기계에 밀려나고 있다. 어디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얼마 전까지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으면 시골 가서 땅이나 파먹는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그런 땅 파는 일마저 기계에게 빼앗겨 버렸다. 산업이 발달할수록 사람은 일자리를 빼앗기며 더 불행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힘든 농사 일보다 올 배추값을 더 걱정하는 농사꾼 노진용(60) 씨
힘든 농사 일보다 올 배추값을 더 걱정하는 농사꾼 노진용(60) 씨박도
몇 해 전, 중국에 갔을 때다. 고속도로 마무리공사로 가드레일 페인트칠을 하는데 10미터에 한 사람 꼴로 붙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을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하느냐고 말하였더니, 안내를 맡았던 운전기사가 중국정부에서는 저렇게라도 일자리를 만들어서 임금을 준다고 했다.

지난해 남겨놓은 퇴비가 밭에다 내기에 부족했다. 마침 아내가 장터 마을에 간다고 하여 따라 나서서 농협에 가서 부산물비료 퇴비 세 포를 더 사왔다.

올해는 완전 유기농사로 지을 작정이다. 그래서 두둑에 비닐도 덮지 않을까 한다. ‘참살이(웰빙)’에 관심이 많은 책 전문가 최종규씨가 내 책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겉그림에 비빌 덮는 장면을 보고 아쉬움을 전해 왔다.

좁은 텃밭에 욕심내지 않고서 상추 쑥갓 등 몇몇 작물의 씨앗을 뿌린 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의 말을 몸으로 터득하면서 올 여름과 가을을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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