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졸업 두 달 앞두고 자퇴한 이유

[인터뷰] 박진아씨...내 삶은 학교밖에 있었다

등록 2005.04.29 00:00수정 2005.04.2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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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학교 ×까라 그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 현수(권상우 분)가 학교를 떠나며 남긴 울분의 대사다. 다소 과하게 설정된 영화의 한 장면이긴 하지만, 억눌린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갑갑한 가슴을 뚫어 주는 대리만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떠나 자유롭게 살아 봤으면 하는 상상을 해 보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건 청소년기에 잠시 꾸는 꿈이 되기 십상이다. 대부분은 이런저런 반항 끝에 고개를 숙이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제도 속으로 걸어간다.

두달 남기고 학교를 그만둔 이유가 뭐냐고?

박진아(20)씨는 작년 10월에 학교를 그만뒀다. 고3 10월, 그야말로 졸업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굳이 대학 진학에 뜻이 없다고 해도 두달만 버티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는 박진아씨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는 박진아씨나영준
"재미있고 수업도 즐거웠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니까요. 청소년 활동을 여러가지 해 왔는데 매번 학교와 부딪혔고 그때마다 고민이 생기더군요. 대충 시간 때워서 졸업한다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틀과 제도가 싫었어요."


중3 때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학교 밖 생활을 경험하게 됐다는 진아씨. 이후 '청소년 문화 공동체'에서 축제를 기획하기도 하고 '18세 선거권 연대' 활동, 교육방송 토론 프로그램 출연 등 누구보다 바쁜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진아씨가 바빠지면 질수록 학교와의 마찰도 잦아졌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안 좋아하죠. 제 뜻과는 다르게 곡해를 하니까요. YWCA가 주최한 청소년 흡연 실태에 관한 간담회에 참여했는데, 학교에선 '우리 학교에 담배 피는 아이가 어딨냐'며 나무라더군요. 덕분에 징계도 받았고…."


연습실에서 소품을 낀 진아씨
연습실에서 소품을 낀 진아씨나영준
결국 2학년 10월 중순경 한 교육 관련 토론 프로그램에서 이성 교제에 대해 발언한 것 때문에 '학교가 뒤집힐 정도'로 혼이 났다. 당연히(?) 심한 매질도 따라왔다. 그 일을 계기로 진아씨는 '이 틀 안에서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섰다.

당연히 부모님은 펄쩍 뛰셨다. 부모님은 울며 읍소하기도 하고 진아씨에게 심한 매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녀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결국은 그녀가 이겼다. 그렇게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3학년 10월, 졸업이 달랑 두달 남아있었다. 하지만 두달이건 한달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자퇴뿐. 진아씨는 그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그 표정에는 군더더기가 없어 보였다.

"부모님께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순간의 울분이 아니라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하자고…. 그래서 시기가 조금 늦어진 것뿐이에요. 선생님도 물론 말리셨죠. 하지만 친구들은 오히려 제 뜻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어요. 지금은 부모님도 이해해 주시고 오히려 지원해 주세요."

진아씨는 고등학교를 그만뒀다고 해서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대학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때도 공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지 결코 대학이라는 '타이틀'을 따겠다는 생각은 없다.

나는야 극단 진동의 스무살 조연출

단원들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 왼쪽은 극단 대표 박종우씨
단원들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 왼쪽은 극단 대표 박종우씨나영준
지난 4월 25일 오후 5시경. 그녀를 따라 서울 이문동에 위치한 극단 진동의 연습실을 찾았다. 극단 진동은 청소년 연극 단체로 진아씨는 작년부터 이곳 일을 함께 했다. 20평 남짓한 허름한 연습실이지만 이곳에서 스무살 진아씨의 꿈이 영글어 가고 있다.

저녁 연습 시작 전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그녀에게 "매일 식사 준비를 하냐"고 묻자 "원래 '제조상궁'이 따로 있는데, 오늘은 대타로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막내라 특별히 일을 많이 하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단원들도 번갈아 가며 식사 준비를 거들었고 설거지는 남자 단원의 몫으로 남겨졌다.

진아씨가 극단 진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진동에서 무대에 올린 <렛츠 알바>라는 청소년 극을 만나면서부터다. 진아씨는 다섯 번이나 볼 정도로 <렛츠 알바>에 흠뻑 빠져 버렸고 자연스레 극단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이후 여러 번 찾게 되면서 스태프와도 알게 되고 극단 대표님과도 친분을 쌓게 됐죠. 물론 그 이전부터 연극을 너무 좋아했지만요."

저녁 7시 반경 연습이 시작됐다. 준비하고 있는 연극 <지금 해라>(5월 16일~26일, 인켈아트홀)가 권투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배우들은 거울을 보며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조연출을 맡은 그녀는 극 진행에 맞춰 배경 음악을 깔아주는 일을 했다. 극 중간 중간 "암전, 조명 1" 등의 구호를 외쳐가며 진행을 돕기도 했다. 연습에 참여하지 못한 단원 대신 대사를 읊어 주는 것도 조연출 진아씨의 몫이다.

<지금 해라>는 학교의 왕따 현상을 다루고 있다. 본인이 얼마 전까지 몸담았던 교육 현장의 이야기여서일까. 진아씨는 배우들의 대사와 동선을 따라가며 연극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연습은 밤 10시 반을 넘겨서야 끝났다.

스무살, 너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

연습실이 마무리되고 자리를 옮겨 단원들과 가볍게 술 한 잔을 나누는 자리. 곁에서 지켜보는 단원들은 언니, 오빠로서 진아씨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작년에 학교를 그만둔다고 할 때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근데 말을 안 듣더군요. 솔직히 말해 지금도 진아가 사는 모습이 썩 마음에 차지는 않습니다."

극단 대표인 박종우씨는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박종우 대표는 평소 진아씨가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까지도 진아씨에 관한 것이라면 그에게 물어볼 정도라고.

연습 중. 다른 배우의 역할을 임시로 맡았다.
연습 중. 다른 배우의 역할을 임시로 맡았다.나영준
"본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빨리 앞서나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밟을 걸 밟아 가며 사는 것도 필요하거든요. 한두 해 살고 말 것도 아닌데…. 너무 똑똑하고 영특한 친구라 아깝고 귀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박 대표가 다소 냉정한 얘기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옆에 앉은 진아씨의 표정에서는 섭섭함이나 서운함을 느낄 수 없었다. "(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 대표뿐만 아니라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다른 단원들도 하나 같이 진아씨의 편을 들어 주지는 않았다.

"그 생각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2개월만 다니면 되는데¨. 사회 생활하는 데 졸업장 있어서 손해 날 건 없거든요.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지금도 안 되고…."

사람들이 "그래도 두 달만…, 두 달만…" 할 때면 진아씨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결국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한번 이해시켜다오'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요. 제 삶을 찾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부터 남은 기간은 제게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남의 삶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너무 힘든 일 아닐까요? 저는 저대로 열심히 사는 것뿐인데…."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연습이 끝난 후 단원들과 회식 중이다.
연습이 끝난 후 단원들과 회식 중이다.나영준
"작년에 오히려 친구들에게 미안하던 걸요. 대학 입시에 죽자 사자 매달려 있는 친구들에 비하면 자유롭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더이상 다녀야 하는 학교가 없는 진아씨의 일상은 단순하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는 극단으로 출근해 연극 연습을 한다. 또 특수학급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치는 보조교사로 참여하기도 하고 매주 월요일마다 '아름다운 가게'에 나가 자원봉사를 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후회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진아씨는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시나리오 작가가 꿈인데 요즘 '글발'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 정도가 고민이라고 할까.

물론 시간이 흘러 진아씨가 마음을 고쳐 먹고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갈 수도 있고 어른들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 수도 있다. 그게 뭐 대수랴. 박진아는 인생을 즐기기에도 너무 바쁜 스무살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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