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0년! 우토로 마을 사람들에게 과연 조국은 무엇일까.대책회의
"식민지 정책에 희생된 동포의 호소에 귀 기울여야"
이어 결성식 참가자들은 불교평화연대 진관 스님이 낭독한 결의문을 통해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우토로 주민의 기본적 생존권을 박탈하고 우토로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일련의 행위를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우토로를 이대로 역사에 묻히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전쟁범죄를 덮어주는 것이고, 또한 스스로 역사 청산을 포기한 한국정부의 부끄러운 과오를 은폐하는 것"이라 꼬집었다.
이들은 또한 "우토로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살아 있는 역사이자 동시에 반전, 평화의 기념비"라며 "질곡의 역사를 질풍노도와 같이 살아온 이 땅의 민중들과 식민지 정책에 의해 고향을 떠나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온 조선의 후예들의 호소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대책회의는 앞으로 우토로 거주 1세들의 고향방문 실현과 서명, 모금운동, 토론회 등을 준비해 우토로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킬 계획이다.
대책회의는 또 유엔에 우토로 문제를 제기하고 평화나 거주권 관련한 국제엔지오들과도 연대하여 일본 정부가 스스로 해결에 나서도록 국제여론 조성에 힘쓴다는 방침이다.
우토로 문제에 대한 참여와 후원 등은 대책회의 홈페이지(http://www.utoro.net)를 통해 할 수 있다.
| | 조국한테 버림받은 세월 60년, 우토로 | | | 1941년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귀국하지 못하고 정착 | | | | 우토로는 일본 교토(京都) 우지(宇治)시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 이름이다. 이곳에 조선인 징용자들 1500여명이 끌려간 건 1941년. 전쟁에 쓰기 위한 교토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일본국제항공공업'이란 군수회사가 이들을 강제로 끌고간 것이다.
해방이 됐으나 우토로에 있던 징용자들은 대부분 조국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배삯은커녕 먹고 살길도 막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토로엔 약 6500평 땅에 65세대 약 200명의 재일동포가 살고 있다. 이중 23세대가 고령자와 함께 살고, 12세대는 노인들만 살고 있다. 이외 생활보호를 받는 세대가 십수 세대에 이른다. 생활환경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1987년 이후 일부 세대에 상수도가 보급되긴 했지만 대부분 가정은 아직도 우물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수도 시절도 안 갖춰져 해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침수 피해에 시달린다.
더 큰 문제는 '일본국제항공공업'의 후신인 '(주)닛산차체'(1971년 설립)가 지난 1987년 우토로 주민들 몰래 땅을 '서일본식산'이란 회사에 팔아넘긴 뒤 시작됐다.
우토로 주민들은 '서일본식산'이 1989년 "건물을 비우고 나가라"며 제기한 '건물수거 토지명도' 소송에서 패소를 거듭했고, 지난 2000년 최고재판소(대법원에 해당) 항소했지만 기각돼 패소가 확정됐다. 언제 강제철거를 당할지 모를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한편 우토로 주민들은 지난 4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토로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일본정부가 재일조선인에 대해 전후보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면서 "우토로 재일조선인 마을이 앞으로도 존속할 수 있도록 일본정부에 요청해 달라"고 호소했다.
주민들은 또 노 대통령에게 "전후보상차원에서 취급하는 것이 어렵다면, 고령자와 생활보호세대를 포함한 우리의 생활권, 거주권을 보호한다는 인도적 차원에서 일본정부에 적절한 조치를 요청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 이민우 | | | |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 [참말로](www.chammalo.com)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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