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72회

등록 2005.04.29 07:41수정 2005.04.2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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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네들 짓이었나? 그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서…?"

침묵을 깬 것은 마의노인이었다. 섭장천은 초점 없는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그리고 자네의 친구들은 이제 다시 손에 피를 묻히기로 작정한 것인가?"

"어쩌면… 자네라고 아직 손에 피를 묻히고 사는데 우리라고 그러지 못하란 법이 없지. 자네의 솜씨는 예전과 다름이 없더군."

그 말에 섭장천의 눈에 잠시 당혹스런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알고 있었나?"

"최소한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없네."


"풍장주도 알고 있겠군."

"그라고 눈과 귀가 없을까? 하지만 풍철영과 말하지 않은지 벌써 십년이 넘었네."


최소한 자신들은 알고 있는 사실을 풍철영에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다행일지 모르지만 섭장천은 다시 한번 이들의 능력에 감탄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그들에게는 한계가 없었다. 그런 조직을 만들어 자신의 수족(手足)처럼 사용한 그 사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떠한 조직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세심한 데까지 챙겨도 틈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상대했던 그 조직에는 틈이 없었다. 유일한 틈이라면 너무나 완벽하다는 그 하나였다.

섭장천은 마의노인의 말에 지금까지 그들이 조심스럽게 조사해 오고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완벽한 조직은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나 완벽했기에 그 정점에 있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자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옳았다. 설사 그것이 다시 한번 저들과 맞상대해야 하는 일이 될지라도 있는 그대로 말을 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장안의 관왕묘에서 처음 볼 때 얼마나 놀랐던가? 초혼령. 그의 화려한 명성과 만인의 존경을 한순간에 접게 만들었던 그 물건을 보았을 때 그는 내심 얼마나 당혹스러웠던가? 더구나 침착함과 인내심은 부친을 닮아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고, 나이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하는 판단력과 정확한 대응능력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제 두 번째로 보는 것이다.

"자네의 부친은…."

탄식하듯 입을 연 그에게 지금까지 아무 말하지 않고 있던 담천의가 입을 열었다.

"인간백정이셨습니까?"

돌연한 그의 말에 섭장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입가에 메마른 웃음이 번지더니 결국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후하하하… 누가 그러던가?"
"도귀(刀鬼)가 조금 전 지껄인 소리네."

대답은 마의노인이 했다.

"도귀… 그 친구도 여기에 있나?"

"자네가 괴로운 이 세상을 떠나게 만든 악조량(岳操梁)만 없지."
"팔 한개 내 준 것 치고는 꽤 후한 값을 받았군."

"도귀는 이곳에서 가축을 잡는 일을 한다네. 자네가 저녁에 먹은 오리도 그가 잡은 것이지."

"사람 죽이는 일보다야 나을 테지. 하지만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지 않은가?"

"우리네 삶이란 게 다 그런거지. 나 역시 아직 말똥을 치우고 있다네."
"그거야 자네는 마누라보다 말이 더 좋아서 하는 일 아닌가?"

그 말에 마의노인은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섭장천의 시선이 다시 담천의에게로 돌려졌다.

"도귀는 참으로 자학적인 말을 했군.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지. 우리 모두가 인간백정임에는 틀림없을 거야. 그 양반 역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그래도 모질지는 못했어."

"…!"

"욕심 많은 주원장이 명을 세운 게 잘못이었지. 글을 읽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른다는 그 무식한 떠돌이 중놈이 어떻게 이 천하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지도 모르지만…."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군웅이 할거한 난세에 태어나 먹을 것이 없어 전전하던 주원장이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다 한들 병법이라도 제대로 배웠을까? 하지만 그는 거지생활서부터 밥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들어간 절에서까지 배척을 받으면서도 조그만 경험을 소중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그리고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만으로는 한 지역을 얻는 패자(覇者)는 될지언정 천하를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 부친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는 있는가?"

"군문에 계셨다고 알고 있소."

"젊은 시절은 전장 터에서 보낸 장군이시지. 하지만 그 이후에 아주 특이한 조직에 몸담고 있었네. 나라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않는....아주 특이한 조직이었지. 주원장처럼 간교하고 잔혹한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조직이었네."

명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명을 세웠으나 아직 원의 잔당은 중원 곳곳에서 그 기세가 쉽사리 꺾이지 않았고, 한 때 자신이 몸담았던 백련교도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언제든 그의 등에 칼을 꽂으려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명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강남의 뿌리 깊은 토호와 지주는 그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칫 기회라도 준다면 자신은 이리저리 몰리다 개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굶주림을 아는 그에게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대대손손 그 부와 권력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한손에 움켜쥔 이 천하를 영원히 주씨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 북쪽으로 쫓겨 간 달탄(韃靼)이나 올량합(兀良哈) 등 북원(北元)의 세력이 아직 건재해 언제 남하할지 모르는 위험도 있었다.

중원 안에 있는 원의 잔당들은 소탕하되, 북원을 정복할 생각을 접었던 것은 황실을 공고히 하자는 뜻이었다. 더구나 명을 세우는데 도움은 주었지만 이제는 걸림돌이 된 전우와 동료들은 언제 자신의 등 뒤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적이었다. 아무리 논공행상을 했다 하더라도 모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는 다르게 배운 자들이었다. 덕망이 있는 자들이었다.

자신을 지켜줄 금의위를 만들었지만 그들은 행사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원장에게는 국법에 따르지 않는 자신만의 비밀스런 조직이 필요했다. 숙청에 필요한 사전작업을 할 조직이었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항거하는 백련교의 잔당들을 소문 없이 처리할 조직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균대위였다.

"균대위의 수장(首長)이 바로 부친이셨네. 초혼령… 그래. 자네가 가진 그 초혼령은 바로 자네 부친의 것이었네."

초혼령. 공포의 상징으로 알려진 이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백련교의 잔당을 처리하는데 사용된 초혼령은 정말로 완벽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초혼령을 받은 자는 모두 죽었거나 실종되었지. 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네. 대부분이 실종되었지. 끝까지 항거하거나 자결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곳에 모였네. 무공을 폐지하고 일구어 먹을 땅을 주었지."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넓은 땅이었지만 그들은 도망칠 수 없는 천험의 절지에서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가옥을 짓게 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을 대주었다.

"주원장의 주구였지만 인간적인 사람이었지. 처음에 우리는 이를 악물고 그를 죽이려 했네. 우리에게 비친 그는 주원장의 충실한 개였으니까. 하지만 시일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지."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서로가 추구하는 목표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대상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더욱 그 갈등은 깊어진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갈등의 폭을 좁히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다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치졸한 피해의식이나 옹졸한 자존심에서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사실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주장이나 가치관을 굽히는 일이 아님에도 말이다.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들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시일이 흐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의원도 생겼고 시장도 생겼다. 그들에게 있어 부족한 단 하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제43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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