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에 오른팔 잃어버린 아버지

[부모님 자서전]

등록 2005.05.01 15:47수정 2005.05.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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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두 분의 모습은 나의 기억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두 눈 사이의 미간은 찡그려도 힘을 받지 못하였고, 얼굴 곳곳에는 보이지 않던 거무스름한 색깔의 점들과 잡티만 두드러지게 보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오른 팔이 없는 채로, 양 볼의 살들이 아래쪽을 향해 힘없이 늘어져 있고, 어머니 역시 피부의 탄력이 전혀 없어 두 눈의 끝이 아래로 내려 온 듯하고, 윤활유가 다 닳은 삐걱거리는 톱니바퀴처럼 불편한 다리 관절 때문에 엉거주춤합니다. 언제부턴가 두 분의 모습이 시골집 안방 모퉁이에 걸려 있는 흑백 사진의 노인들처럼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4월 3일 두 분은 흑백 영화 속의 주연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모관대와 흘러내릴 듯이 앞으로 숙여 나온 족두리를 머리에 인 채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어머니의 일기에 나온 표현처럼 두 분이 '새로 태어 나는 날'이었죠. 그리고는 합천 해인사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대구 남산동에 조그만 신혼살림을 차리고 새 삶을 시작했답니다.

a 두분의 결혼식 장면입니다. 탁자위의 닭이 축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네요

두분의 결혼식 장면입니다. 탁자위의 닭이 축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네요 ⓒ 박진서

그로부터 열 달 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제가 태어난 지 37년이 지난 오늘 두 분과 이렇게 마주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그 어린 나이인 열다섯 살에 가출을 해서 대구로 나오실 생각을 하셨어요?"
"… 글쎄…. 뭐라케야 되노? 그냥 그때는 그래야 될 거 같더라. 무신 일이든지 하고 싶었고, 그 촌구석에 처박히 있으마 아무 것도 못 할 거 같더라. 우예보마 순간적인 일이지만도 지금 생각하마 안 잘나왔나 싶데이. 그래서 지금 이래라도 안 묵고 사나. 안 그렇나?"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나와서 고생을 많이 하셨을 건데…아버지 젊었을 때 얘기 좀 해주세요."
"아이고마 됐다. 그 때 얘기 하마 뭐하노…굶기도 많이 했고….우야든가 살라꼬 마이 지랄 안 했나."


몇 번이나 그에 대해 여쭤봐도 어머니와 만나기 전의 삶에 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시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자식에게조차도 아픈 기억은 되새기기 싫어서 그런 걸까요?

"엄마는 결혼 전에 아버지가 뭐 하셨는지 아시는 거 있어요?"
"나도 잘 모린다. 그냥……아! 맞다. 당신 책 팔로 다닜다 안 캤는교? 그 뚜껍한 옛날 책 들고 이 골목 저 골목 다닐라 캤으마 마이 안 힘들었겠나…그거 말고도 안해본 기 없다카이."


그러고는 날 낳으시고 얼마 안 있어서 먼 친척 어른이 운영하던 공장을 그만두고 친구 분이랑 동업을 하셨다고 했다. 이불에 들어가는 솜을 가공해서 이불을 만드는 봉제공장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모든 서민들의 삶이 그랬듯이 작업 환경과 안전에 대한 취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일을 하셨던 거 같다.

a 신혼시절 모습으로 이때는 양팔이 건강하게 있습니다.

신혼시절 모습으로 이때는 양팔이 건강하게 있습니다. ⓒ 박진서

"그 먼지꾸디에서 돈 한 번 벌어 보겠다꼬, 참 마이 고생 했는데…그래도 그기 지금 우리 이래라도 밥먹고 살구로 만들어줬다."
"아버지, 그 밥벌이 때문에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지렛대인 오른 팔을 잃어버리셨잖아요."
"그 때 얘기는 말라꼬 하노?"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으시다. 어머니가 천천히 꽉 오므린 입술을 가늘게 떨며 입을 여신다.

"놀라가 병원에 가보이께네, 팔이 없더라. 누렇고 동그란 붕대만 칭칭 감기지가 있고. 그 붕대 사이로 틈틈이 뻘건 피가 묻히가 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히더라. 그때 여보! 카미서 눈물을 흘리는데, 아부지가 이카시더라. '여보! 내가 꿈을 꿨는데 팔이 없어지는 꿈을 꿨데이. 참 이상하제…' '여보 그건 꿈이 아이고, 생심니더.' 그러자 너그 아부지가 떨어져 나간 팔을 물끄러미 보더이 아무 말도 안하고 돌아눕데…. 그 순간 온통 병실이 울음바다가 안됐나아…. 참말로 기가 막히더래이…."

나는 기억합니다. 대구에 있는 그 병원에–침대가 없는 온돌방 병실이었습니다-왜 그리 손님은 많이 와 계셨는지. 당시에는 먹기 힘든 바나나와 파인애플 통조림을 많이 먹을 수 있는 게 좋아 두 분의 눈치만 줄곧 봤던 그때의 기억을….

며칠 뒤 학교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평소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고 싶어 안달을 했던 나는 그날 우연히 내가 쓴 일기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친 거에 대해 일기를 쓴 날이었죠. 내용이 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그날따라 괜히 날 지명해 발표하게 한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을 뿐이었습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몇 줄을 읽어 나갔죠. 그것뿐이었습니다. 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반 친구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오른팔을 기계가 삼켜 아버지가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가슴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친구들이 놀리는 게 두려웠을 텐데, 스스로 그걸 인정해 버린 거죠.

그냥 그냥 "불쌍한 우리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만 되뇌며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마냥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난 그 뒤로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병신 새끼'라는 욕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친구들도 내게는 그런 욕은 절대 하지 않았죠. 당시 아홉살밖에 되지 않은 그 녀석들도 그 날 나의 울음이 가슴 깊이 남았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옛날 기억을 잠시 떠올리는 순간 어머니가 말을 이으십니다.

"야야… 그래도 우리가 이래라도 살게 된 기 다행이데이. 너그 아부지가 성격은 급하고 고함은 잘 질러도 고생은 많이 했데이. 팔 다친 뒤로 진짜로 걱정밖에 안되더라. 참말로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들맨치로 다친 뒤로 맨날 술만 묵고, 노름이나 하고 그라마 우예 됐겠노? 그런데, 석달 뒤에 퇴원하고나이 안심이 되더라. 너그 아부지가 퇴원 후에 젤로 먼저 시작한기 왼손으로 글씨 쓰는 연습이었데이. 그거 보니까 마 안심도 되고. 인자부터라도 내부터 열심히 살아야겠데이 하는 생각이 들더래이. 그라고 이런 생각을 안했나. 여보! 인자부터 내가 당신 오른 팔이 될라카이, 아무 걱정말고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보이시더…. 그때 액땜을 했는지 몰라도 그 뒤로는 큰 어려움 없이 우리가 자알 살아 왔다 아이가…. 지금 생각해보이 다 지난 얘기데이. 우리는 인자 다 살았고 산 꼭대기에 갔다가 죽을라꼬 인자 내리오는 중 아이가?…."

a 팔을 잃고 나서 몇 년후 처음 장만한 우리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팔을 잃고 나서 몇 년후 처음 장만한 우리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박진서

벌써 두 분이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기시고, 인생이라는 산을 내려오는 중이군요. 두 분도 산행을 가끔 하시니 이런 기분을 아시겠죠. 산을 오르다 산중턱에 서면, 마냥 내가 걸어온 그 길들이 흐뭇해 보이는 기분 말입니다. 인생이란 그런 걸까요? 두 분의 절반밖에 살지 않은 지금의 저지만, 저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지난 일에 대한 긴 회한은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다보며 느끼는 힘찬 감정과 그에 따른 긴 호흡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두 분은 이제 산 정상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내려오다 이끼가 낀 돌부리에 걸려 발가락 끝이 벌겋게 멍이 들 수도 있고, 진흙에 미끄러져 엉덩이에 황토색 빛깔이 질서 없이 묻어나 자꾸 엉덩이를 털며 시간을 지체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산을 올라갈 때 가져간 소중한 도시락이 중간에 넘어져 다 쏟아져 먹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산 정상을 기어이 정복하고 내려오는 두 분을 보면 감히 숙연해질 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산길을 내려올 때는 천천히 내려오십시오. 그렇게 두 분이 아끼고 보고파하는 손자, 손녀 녀석도 인생의 산행을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니까요. 언젠가는 그 손자 손녀 녀석들과도 산길에서 만나겠지요. 그때 다시 너른 자락을 펴고 푸르고 푸른 나무 사이에서 이름 없는 새 울음 소리도 들으면서 오늘 했던 얘기를 구수한 동화처럼 다시 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두 분에게는 내려올 길과 우리에게 해 줄 말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a 60을 넘긴 나이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두 분의 최근 모습입니다.

60을 넘긴 나이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두 분의 최근 모습입니다. ⓒ 박진서

"이제 일찍 주무셔야죠."

아버지가 평소와 다르게 한 마디 더 하신다.

"내가 말 한 김에 한 마디만 더 하자. 너그도 순간 순간 내 급한 성격 땜에 마이 힘들었제? 팔 하나가 없이 사는 게 답답한기 많더라. 그래서 성격도 더 그래 된 거 같기도 하고…. 나도 다 안다. 그래도 웃기는 기 아직도 나는 너그들이 남들보다 잘났으마 싶더라. 며느리 너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욕심이 많아서 그런 기라 생각해라. 우리가 사는 동안 중간에 힘들다꼬 다 포기했으마 우예 됐겠노? 삼십 중반에 팔 하나 날리가 살라카이 얼마나 답답했겠노? 그래도 너그 어마이가 내 오른팔이 되가꼬 내 나머지 인생이 이래라도 좋게 풀린 거 아이가. 너그는 그래도 내보다 안 낫나. 내보다 마이 배았고, 팔도 두 짝 다 있고…. 지내보이 그렇더라… 나라꼬 너그한테 미안하고 섭섭한기 없겠나? 다 말로 못하는 기지… 우야든지 너그 식구들 화목하이 잘 살아야 된데이. 그기 앞으로 우리 도와 주는기다…."

난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인사만 꾸벅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던 긴 밤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 응모글

덧붙이는 글 '부모님 자서전 대필'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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