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영혼의 성적 욕망 관찰기

무라카미 류의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등록 2005.05.04 11:57수정 2005.05.0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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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 그의 실험적인 도전 정신만큼은 모든 독자들이 칭찬할 만하다. 죽은 사람의 시점에 쓰여진 파격적인 소설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작품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에도 그의 단골메뉴 SM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지겨워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분명한 건 그가 SM을 잘 그려내는 것만은 사실), 있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같은 SM이라도 언제나 신선함을 추구하는 류이기에 말이다.


이번 소설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쑥맥 같은 스물 아홉의 남자가 주인공이다. 어느 날 우연히 여자친구의 핸드백 속에서 나온 MASK CLUB 카드.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MASK CLUB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녀의 집에 잠입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더 이상의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그 남자에게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즉, 이 소설은 죽은 화자가 관찰하는 일곱 명의 변태성욕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다.

여자들은 가면을 쓰고 SM(사도마조히즘)을 즐기며 알고 지내던 남자들을 죽인다. 그들은 모두 트라우마(Traumaㆍ정신적 외상)를 갖고 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거나, 부모가 이혼을 했거나,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형체 없는 존재가 되어 떠다니는 화자가 이 여자들의 단단히 봉해진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욕망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죽은 남자의 시점과 여성들의 행동이 오버랩되면서 관찰자로 가장했지만 결국 그 모든 욕망은 관찰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데 있다. 또한 여자의 눈 속 시신경으로 들어가 뇌에 있는 여자의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매우 과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제 곧 정말 죽는 건가.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안도감이 몸을 감쌌다. 존재하지 않게 되면 불안도 공포도 아픔도 의무도 사라지겠지. 그런 것들 이제 지긋지긋하다. 아무래도 나는 이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때때로 주변 온도가 바뀌었다. 따뜻해지기도 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하고 극히 순간이었지만 끓는 물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욕망하라."


나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욕망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런상태가 되어보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의식적으로 욕망하기란 쉽지 않다. 타인의 명령에 따라 욕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나는 그 말을 혼자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타인의 명령에 따라 욕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타인의 명령에 따라 욕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타인의 명령에 따라 욕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면이 없지 않아 가뜩이나 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들은 읽어서는 안 될 듯. 그러나 마지막의 반전을 기대하는 분들이라면 조금 참길 권한다.


류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들 혹은 생각은 하지만 더 나아가지 못한 영역들의 이야기로 신선한 충격을 주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인간의 내재된 성적 욕망이 비뚤어진 사회, 사람들과 맞물려 그려지고 있다.

류는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거품이 꺼졌음에도 새로운 인생을 추구하지 않는 일본 남성의 삶이 모티프가 됐다”고.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소설은 한정된 인간의 부류가 아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모든 인간들의 모습,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봉인하며 살아가는 야누스적인 인간들의 군상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재미가 있고, 한편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다.

이번 소설 또한 그러하다. 그가 언제나 SM의 가학적인 성을 그리듯, 그는 언제나 우리의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주 더러운 느낌이지만, 그의 이러한 능력 때문에 언제나 그의 소설이 기다려지는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감상.

덧붙이는 글 감상.

마스크 클럽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이가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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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분야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순간순간을 말입니다. 기자라는 직업을 택한지 얼마 되지도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 펼쳐보고 싶어 가입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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