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같은 너를 만나고 싶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어디까지 진실해야 하나?

등록 2005.05.05 04:59수정 2005.05.0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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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무대의 뒤를 보여주지 말라.”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셋 모옴이 한 말입니다. 이 금언의 진의를 알 것도 같고, 작가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끔은 아이들에게 무대의 뒤를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령, 수업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너희들 계속 떠들면 절대로 안 때린다!”

안 때릴 테니 계속 떠들라는 말은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확인까지 시켜줍니다.

“선생님은 절대로 매를 안 들 겁니다. 그러니 떠들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면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날은 솔직히 막막해지고 맙니다. 하지만 떠드는 몇 아이를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가 곧바로 앉히면 소란했던 분위기가 곧 진정이 됩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같은 행동을 몇 번 더 반복합니다. 대게는 이쯤해서 기가 꺾기기 마련입니다.

“조용히 해 임마!” 하고 소리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효과가 큰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날 마음의 상태에 따라 입에서 험한 표현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특히 수업이 많은 날이나, 잡무에 시달렸다가 부랴부랴 교실에 들어와 심신이 피곤한 상태로 수업을 하게 되는 날은 너무도 쉽게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자칫하면 학생들과 볼썽사나운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절실하게 깨닫는 것은 교사의 폭력적인 행동이나 부적절한 언사가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교사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입니다. 물론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을 통해 편지도 자주 주고받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한 아이와 하룻밤 사이에 네 통의 메일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어디까지 진실해야 하나?


진실함에 있어서 어떤 한계를 두자는 말은 아니라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어디까지 진실을 보여 주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지요.

제가 내린 결론은 아이들에게 ‘무대의 뒤까지 다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무대의 뒤’란 ‘보여주면 불리해지는 어떤 진실‘을 의미하겠지요. 그러면 불리함을 감수하겠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대의 뒤까지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의 손익계산에서 나온 결론인 셈이지요.


20년에 가까운 교직 생활 동안 저는 그 증거물들을 많이 수집한 편입니다. 오늘도 그 중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 생일을 맞이한 아이와 나눈 편지입니다. 생일 한 달 전부터 편지를 하라고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편지가 오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아이에게 전화를 먼저 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금 전에 전화통화를 했는데 지금은 뭐하는 지 궁금하구나. 너에게 전화를 하면 느끼는 것이 있단다. 너의 목소리,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 너의 담임이 되고 너에게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너의 밝고 기쁨에 넘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구나. 3월 한 달을 보내면서 너로 인해 많이 행복했었지. 물론 지금도 행복하지만…. 솔직히 조금은 불안하기도 해. 언젠가 한 번 크게 싸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고 말이야. 결국은 사랑싸움이겠지만…. 그래도 너와는 좋은 관계로만 유지하고 싶은데. (…)

너의 편지를 기다리다가 먼저 편지를 썼단다. 첫 편지니까 가볍게 쓰려고 했는데 마음에 있는 말을 하고 말았구나. 선생님이 학생에게 이렇게 깊은 마음까지 다 털어놓으면 손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리고 아직 너희들이 철이 없는데 너무 어른 취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구나. 네가 아직 철이 없고 어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도 친구처럼 너를 대할 거야. 좋은 꿈꾸고 내일 밝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마.


선생님, 저 선생님 전화 받고 지금 답장을 드려요. 휴... 오늘 아프고 그래도 참아보려고 애써서 참다가 집에 오니까 괜찮아 싶더니 지금은 마음이 아파요. 진짜 요즘 어린 철없는 말로 들리지만요 진짜 내가 왜 요즘 사는지 막 자책하게 되고 그래요. 몇 주일 동안 좀 쉬다가 오고 싶어요. 엄마한테 말하니까 엄마는 학교 안 다니면 후회한다고, 좀만 참으라고 몇 달만 버티면 방학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말씀 하시는데, 그 말도 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냥 선생님께 이렇게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괜히 이런 말해서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 건 아닌지. 죄송해요. 좋은 말만 해드려야 하는데 이런 말만 하고. 선생님 그래도 사랑하는 거 알죠? ㅋㅋ^^

안녕! 너의 말이 어린 철없는 말로 들리지는 않는단다. 다만, 자꾸 피하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리고 네 담임이 되었는데 네 마음을 잡아주지 못하면 난 많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어쩌면 넌 다른 아이들이 겪지 못하는 인생의 병을 겪느라 더 힘들 수도 있겠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나름대로 힘들겠지만. 한 순간에 마음을 잡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하루 종일 생활하는 공간인 교실. 그곳에서 만나는 너의 담임. 많이 부족하지만 널 우주보다도 큰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인데, 널 내 생명보다도 더 아끼는 사람인데 그 바보 같은 담임을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야지.

모든 것은 단순할 수도 있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도 병이고. 너에게 책을 한 권 권해주고 싶었단다. 갑자기 무슨 책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것들과 친하지 못해서 생긴 병일 수도 있어. 정말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과 친하지 못하는 것 말이야. 참, 여기 도서관이야. 400여권의 책이 들어와서 바코드 작업 하고 있다. 집에서 밥 먹고 와서... 하다가 너에게 메일이 왔나 싶어 열어보고 편지 쓰는 거야. 또 편지 쓰마. 걱정이 되더라도 이런 얘기 꼭 하거라. 난 네 친구니까. 알았지? 그럼 푹 쉬어라. 사랑한다.


진짜 하나의 마음이 아프니깐 내 마음이 여러 곳이 다 아프려고 해요. 지금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제가 신경 쓰면 머리 꼭 아파요. 언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잠도 안 오고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어요. 막 눈물도 나오고. 혼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어요. 선생님.. 진짜 멍청하니 혼자 밖에 나가 걸어 다니고 싶고. 막 펑펑 울고 싶기도 하고..어디든 가고 싶고. 방황 타고 싶고. 이상한 마음이 자꾸 들어요. 내일 학교에서 뵐 수 있을까요? 아이고 시간이 늦었네요. 선생님, 얼른 안녕히 주무세요...^^

많이 힘들구나. 이럴 때 도와줄 수가 없어서 안타깝구나. 혼자 아파야 하고 혼자 힘들어야하고 내일 아침 답장을 쓰지 하다가 너를 두고 잠자리에 들 수 없어 다시 편지를 쓰고 있다. 잠에 들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겠다. 너의 마음을 낫게 해달라고.. 정말 그 기도의 효험으로 네가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지만 네가 안정이 됨으로 담임을 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정말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로 인해 내가 더 힘들어도 네가 행복하다면 괜찮을 것 같다. 네가 힘들지만 않다면 오늘 너랑 편지를 주고받아서 참 좋았는데... 언젠가는 즐거움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날이 오겠지. 그럼 우리 천사. 잠시 안녕!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헤헤...그래도. 어제는 기분 좋게 잠을 들 수가 있었어요. 제가 한 가지 일 가지고 기분이 안 좋으면 모든 일에 지장이 있는 그런 성격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 되서 걱정이에요. 선생님..지금 많이 좋아졌어요..히히. 선생님! 저 생일로 인해 이렇게 메일 쓰고 그랬는데요!! 자주 종종 선생님께 메일 쓸 겁니다. 선생님, 많이 귀찮게 할 거야. 준철아 너. ♡♡♡

이 마지막 편지를 받은 것과 거의 비슷하게 생일시를 완성했습니다. 보잘것없는 한 편의 시가 아이의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해주는 사랑의 묘약이 되었으면 했는데, 아이의 편지를 받고 보니 이미 상태가 많이 좋아진 듯 싶었습니다. 역시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또 언제 터질지 모르니 안심할 일은 아니지요.

그래도 터지고 아물고 하는 사이에 아이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생일시를 건네 주면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생일시 하고 네 편지 몇 편 오마이뉴스에 올린다. 알았지?"

그러자 아이는 "예."하고 씩씩하게 대답을 하며, 마치 먹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 같은 환한 미소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햇살 같은 너를 만나고 싶다

색깔로 말하면 너는 선홍빛!
그래서인지 너를 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생각난다.

산들바람만 불어도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불덩이지, 너는.

그 불덩이가
이 세상 모든 초록을 만드는
지금은 오월!
너도 초록을 만들다 지쳤을까
하루는 아프다는 전갈이 왔지.

‘진짜 하나의 마음이 아프니깐..
내 마음 여러 곳이 다 아프려고 해요..’
그때, 난 간절히 기도했단다.
이렇게 바꿔지기를 말이지.
‘진짜 하나의 마음이 행복하니깐..
내 마음 여러 곳이 다 행복하려고 해요..’

하긴, 아픈 만큼 행복해지는 거겠지.
햇살 같은 너를 낳으실 때도
네 엄마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겠지.

그러니 아이야,
나는 어서
햇살 같은 너를 만나고 싶구나.

네가 이 세상에 온
못 견디게 푸르른 이날.

2005년 5월 4일

사랑하는 성아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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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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