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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시골동네에 휘몰아칠 듯이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의 기세에 밀려 금가루 같은 봄 햇살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보라색 꽃 잔디 무더기의 여린 잎들도 바람을 이기지 못해 이리저리 쏠려 다닌다.
그런 봄날의 한가로운 오후. 한없이 가여워 보이는 아버지의 꾸부정한 어깨엔 목 메인 기다림이 또 쓸쓸하게 내려앉았다. 아버지는 손녀딸이 탄 차가 언제쯤 동네어귀에 모습을 보일까 노심초사하신다. 아버지는 마치 목이 길어 슬픈 한 마리 사슴처럼 그렇게 오래 서성이고 계신다.
그때 딸아이가 탄 태권도학원 차가 동네어귀로 들어선다. 아버지는 반가움에 거동이 불편하시면서도 종종걸음으로 아이에게 달려가신다. 아버지와 아이는 몇 십 년 만의 상봉인 듯 서로 얼싸안고 볼을 비빈다. 그래봐야 아침 9시에 헤어져 오후 4시에 다시 만났으니 겨우 7시간만의 만남이건만….
이제 아버지와 딸아이는 저녁 해거름이 온 시골동네에 내려앉을 때까지는 더없는 좋은 친구가 된다. 가방을 벗어 던진 딸아이는 외할아버지와 무슨 비밀모의라도 하는 건지 고사리 같은 손을 오므려 나팔을 만든 뒤 외할아버지 귀에다 대고 참새새끼처럼 재재거리며 속삭인다. 정말 아름답고 고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뭔가 결정이 났나보다. 딸아이는 집으로 들어가서 소꿉들을 한 아름 들고 나왔다. 그리곤 외할아버지더러 어서 빨리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곤 집 앞 모래더미로 향했다. 아버지는 딸아이의 따라오라는 눈짓에 신이 나선 행여 뒤떨어질세라 종종걸음을 치셨다. 나는 아버지와 딸아이의 소꿉놀이가 못내 궁금해 살그머니 뒤따라 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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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로 밥을 짓느라 분주한 딸아이 ⓒ 김정혜
"할아버지 여보! 조금만 기다리세요. 얼른 밥해 드릴게요."
"응. 그래. 아직 배 안 고프다. 그라니까네 천천히 해~~."
딸아이는 모래를 냄비에 가득 퍼 담곤 쌀 씻는 시늉을 하더니 채 1분도 안되어 밥이 다 됐는지
"할아버지 여보! 이제 밥 다 됐어요. 어서 드세요."
"응. 그래 밥 묵자. 아니 그란데 반찬도 없이 우째 밥을 묵노?"
"아, 맞다. 맞다. 잠깐만요. 제가 금방 맛있는 반찬 만들어 드릴게요."
딸아이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어디선가 풀을 한 주먹 뜯어다간 돌멩이에 놓고 반찬 만드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예쁜 접시에 담아서 제 외할아버지 앞에 가져다 놓았다.
"할아버지 여보! 반찬 여기 있어요. 꼭꼭 씹어서 천천히 맛있게 드세요."
아버지께서 식사를 하시는 시늉에 아이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집안으로 부리나케 달려간다.
잠시 후. 소꿉놀이 컵에 물을 한가득 들고 나왔다. 그리곤
"할아버지 여보! 다 드시면 여기 물드세요. 물은 몸에 좋대요."
딸아이의 생뚱맞은 그 말에 아마도 아버지는 놀라셨는지
"물이 몸에 좋다고 누가 그라더노?"
"엄마가요. 엄마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한 컵 가득 줘요. 그리곤 천천히 마시래요. 물이 몸에 좋다면서요. 할아버지! 진짜 물 많이 마시면 튼튼해지는 거예요?"
"응. 그래 맞다. 물을 많이 마시면 몸속에 나쁜 것들이 다 씻겨 내려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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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꿉놀이에 마냥 행복한 아버지와 딸아이 ⓒ 김정혜
그사이 아버지는 식사를 다하신 모양으로 빈 소꿉들을 딸아이 앞에 놓으셨다. 아이는 "이젠 할아버지가 복희 밥해 주세요. 왜냐하면 복희가 아프거든요. 아빠도 엄마가 아프면 밥 잘해요!"
아이는 제 아빠가 정말 밥을 잘한다는 것을 행여 외할아버지가 믿지 않으실까봐 안달이 난건지 엄지손가락을 힘 있게 펴 보이며 거듭해서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딸아이가 몇 번씩이나 강조하는 그 말에 당신 딸의 행복을 엿보기라도 하신 모양인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으셨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술술 빠져 나가는 것도 잊으신 채 그저 한주먹 가득 모래를 들고만 계신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딸아이가 성급하게 재촉한다.
"빨리요. 복희가 지금 아프니까 빨리 할아버지가 밥해 주세요."
"어 그래그래."
아버지는 분주히 모래를 냄비에 퍼 담고 풀들을 접시에 담으신다. 그리곤 "여기 있어요. 어서 드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도 저보고 복희 여보 어서 드세요.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좀 쑥스러우신지 한동안 머뭇거리시더니 얼른 한마디 하신다.
"복희 여보. 어서 식사하세요." 하시곤 껄껄껄 큰 소리로 웃으신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한 일이다.
나도 남편도 이제껏 서로에게 여보 당신이란 호칭을 별로 써보지 않았건만 아이는 소꿉놀이 하는 내내 할아버지 여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건지 내심 궁금해진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모래 밥과 풀 반찬을 아주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고, 또 물까지 아주 시원스럽게 마시는 시늉을 하더니 소꿉들을 한데 모으곤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여보. 나 설거지 하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이는 온통 흙투성이가 된 소꿉들을 들곤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소꿉들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복희 여보 빨리 와" 하시며 앙상한 손을 들어 아이의 뒤에다 대고 호들갑스럽게 흔드셨다. 그런 내 아버지의 어깨위로 또 하얀 머리위로 늦은 오후의 봄 햇살은 축복처럼 눈부시게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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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히 씻어 엎어 놓은 딸아이의 소꿉들 ⓒ 김정혜
잠시 후. 아이는 손에 물을 잔뜩 묻힌 채 밖으로 달려 나오더니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 마리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어디론 가를 향해 그렇게 날아갔다.
봄, 햇살, 꽃, 나비, 그리고 내 아버지와 내 딸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시골풍경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오늘 하루. 나는 또 이렇게 행복이란 것을 한 움큼 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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