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66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5.10 07:24수정 2005.05.10 13:46
0
원고료로 응원
"이번 거래엔 결코 반값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내가 직접 나온 이유가 그 때문이오."

지난 번 거래에선 청국인들의 강압과 위협에 굴복한 나머지 거의 절반 값에도 못 미치게 물건을 건네준 일을 권기범이 꼬집었다.


"크험. 험. 그게 꼭 저들 힘에 눌려 그런 것만은 아니올시다. 워낙에 지금 대세란 것이 인삼 공급이 차고 넘치니 당연 시세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책문후시와 사행길을 통한 공식적인 포삼무역 외에도 이렇게 잠매하는 물량도 무시를 못합니다. 오죽하면 평안도와 함경도로 내려오는 암행어사들마다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 있는 각 포구의 바깥 바다에 중국의 배가 때도 없이 오가면서 모리배들과 몰래 장사를 하고 있으니 대책이 절실하다는 계를 아니 올리는 때가 없겠습니까."

개성 행수 서문길도 꼬장꼬장하게 변명을 했다.

"여하튼 이번에도 저들이 그리 나온다면 차라리 삼을 태워버리시오. 값이란 게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기가 어려운 법이오."

"어허, 그리 뻗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래두요."

"또 그 청국 상인들이 힘을 믿고 나댄다면 본때를 보일 것이오. 포삼의 최대공급원인 우리를 제끼고 제 놈들이 별수 있나 두고 볼 심산이외다."


"오히려 그 틈을 군소 밀매상들이 잠식하게 될 겁니다. 그땐 정말이지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될 터인데요."

"우리가 안 팔면 누구도 팔지 못하오!"


권기범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게 쉽겠습니까. 개성의 가삼재배는 이미 포화상태이고 증포소 또한 놀릴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만약 포삼 밀매가 한 두 해라도 막히는 일이 생긴다면 그들의 생계를 뉘라서 책임질 것입니까. 그리고 해서지방에 일어나는 중국배에 의한 소란은 밀조한 홍삼으로 인한 것이고, 이는 모두 개성에서 홍삼을 규정된 양을 넘어 밀조하는 데서 말미암는다는 것은 관과 민을 떠나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거래를 끊는다 해도 그 많은 잠매상들은 어찌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애초 권기범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감을 잡은 바는 있었으나 속에 있는 생각을 내처 물었다.

"우리가 청국 상들과 거래하지 않는 한 단 한 뿌리의 인삼도 이 땅에서 반출되지 아니할 것이오."

여전히 서리처럼 차가운 말로 일축할 뿐이었다. 일하는 인부들에겐 들리지 않을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그 가을 서리 같은 서기에 섬뜩함마저 일었다.

서문길은 이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스스로 수적(水賊)을 자처하려는 것이리라.

조선의 모든 삼은 개성에서 산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삼을 만드는 증포소 또한 개성에 몰려 있다. 그렇다면 인삼의 유통 상황은 모두 개성 상단의 손바닥 안에 놓여있다는 이야기고, 자멸을 각오한다면 소집단의 소소한 거래까지도 상단 자체에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설사 귀신같이 바닷길로 나선 자가 있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터였다. 해서 일대의 밀무역 판로를 손금 보듯 꿰고 있는 이들이 청국 상인들과의 거래를 그대로 허용할 리가 없었다. 이번 거래에도 전선을 끌고 나오겠다던 이들이다. 포삼 밀매에 120여 명이 넘게 승선하는 전선이 웬 말인가 싶기도 했고 자칫 청국의 상단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기에 극구만류하였다.

그 덕에 전선의 출현은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나타난 게 오늘 끌고 온 병조선이었다.

"세상에. 인삼 거래에 화포로 무장한 배라니…"

이런 자들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그냥 이 상단의 호위를 위해 나선 장수는 아니신가 보구려. 하긴 운산 물주의 자제께서 기껏 상단 호위란 게 될 법이나 할 말이오."

"……"

"아까 배가 접안할 땐 내려서던 장졸들을 보고 많이 놀랐더랬습니다. 날랜 것도 날랜 것이지만 왠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확 끼칩디다. 왜 이번 거래를 운산 물주 쪽에서 직접 호위하겠다 하였는지 그 연유를 알 듯도 합니다. 화적이나 시정 무뢰배 따윈 우습지도 않게 본다는 게 저희 상단의 장정들인데 비할 바가 아니더구먼요."

"……"

"뜻대로 하십시오. 저희 대인께서도 운산 물주 말씀에 따르라 하였으니 토를 달지 않겠습니다."

모선에 마지막 짐이 실렸다는 신호가 왔다. 개성 상단에서는 행수 서문길과 화승총을 든 장정 둘, 짐꾼 둘만 남고 나머지는 나귀를 거느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섰다.

"승선!"

권기범이 쪽배에 오르며 좌우 바위 언덕을 향해 소리를 보냈다. 어둠 속에서 인기척도 없이 사주경계를 하던 검은 옷의 사내들이 쏟아져 내려 왔다. 다시 첨벙첨벙 바다로 들어선 사내들이 오르자 뱃전의 문이 들어올려졌다. 노 젓는 소리 몇 점, 파도를 가르는 소리 얼마만이 떠돌 뿐 배는 칠흙 같은 어둠에 묻혀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이 기자의 최신기사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3. 3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4. 4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5. 5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