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이는…."
마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섭장천이 그의 말에 덧붙였다.
"그 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저 아이의 부친이 처했던 그 상황과 다른 것은 하나도 없어. 어느 순간 저 아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관이 그들의 요구와 상반될 때 저 아이는 부친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야."
"그렇겠지. 내가 저 아이를 자네에게 데리고 온 이유도 그것이네. 최소한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모르고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일 것을 두려워했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했다면 최소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죽어야 할 게 아닌가?"
섭장천 역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바였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이 아이를 데려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역시 숨김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자네들에게도, 그리고 천지회에게도 저 아이는 없는 게 더 나은 존재지. 어쩌면 비원에서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네. 저 아이가 그들의 의도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말일쎄."
"그렇군.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외진 다관에서 몽화가 한 말도 떠올랐다.
-당신은 당신의 태도를 빠르게 결정해서는 안돼요. 지금까지 당신은 당신이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동안 잘해 왔어요. 문제는 지금부터예요. 당신은 신중한 사람이니 당신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것이라 믿어요. 당신을 원하는 곳은 세군데이지만 당신이 그 중 한 군데를 선택하게 되면 나머지 두 군데에서는 당신이나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노릴 것이고 당신은 마음이 아플 거예요.-
그의 부친은 그 당시의 모든 권력과 실리와 힘의 역학관계에서 희생된 희생양이었다. 힘을 가지고 대립하는 교차점에 서 있었던 사람이 바로 그의 부친이었다. 그들은 어느 순간 적당한 타협을 원했고, 그 타협의 결과가 그의 부친의 죽음이었다. 담천의는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강중장군… 그분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젊은 혈기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달려들겠다는 것이다. 섭장천은 마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노는 마른기침을 하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네. 다만 나는 저 아이가 올바른 선택을 하기 바랄 뿐이네."
"이 일은 예상치 못할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불씨를 지피는 일이 될 수도 있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저 아이가 선택할 때까지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네."
그들의 말은 분명 옳은 것이다. 담천의에게는 지금 적이 누군지, 친구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분명했다. 모두 적이 될 수 있었다. 정확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필요했다. 지금 그것을 정확히 아는 방법을 찾았다. 섭장천이 말한 세 사람을 찾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부는 정확히 말해 줄지 의문이었다. 그가 가장 만나기 쉬운 사람은 그였지만 이미 그의 의도는 두 노인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사실을 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나머지 두 사람 역시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세 사람 모두에게서 말을 듣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대상으로 강중을 택한 것이다.
"저 아이가 매우 위험하겠군."
보이지 않는 적이 무섭다. 친구라 생각했던 자의 갑작스런 배신이야 말로 더욱 위험하다. 믿었던 인물이 자신의 등에 꽂는 비수가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저 아이의 몫이네."
그들의 대화는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 그리고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는 것. 그저 그의 혼자 힘으로 이것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의 대화가 끊겼다. 섭장천의 얼굴에는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변화가 반복되었다. 그가 갈등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담천의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섭장천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마 강중에 대해서 말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자네가…."
그 순간 말이 끊겼다.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왔군."
"나가서 맞이해야 할까? 아니면 들어오게 그냥 두는 게 좋을까?"
"그거야 자네 마음이지 않은가?"
"자네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을 풍철영이 보면 좋아하지 않을 터인데."
"자네 걱정이나 하게."
이미 그들은 앞에 와 있었다. 아무리 발걸음을 죽였다 하나 이십 여명이나 되는 인원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이 실내에는 없었다.
"왔으면 들어들 오게나."
섭장천은 밖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담천의는 자신의 고막을 파고드는 음성이 그 말과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았다.
'노부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지만 강중은 개봉 북쪽 외곽에 있는 용화사(龍華寺)에 있네.'
섭장천의 전음이었다. 담천의는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강중의 소재를 밝혀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가 입을 다물어도 무어라 할 일이 아니었다. 섭장천의 얼굴에 허탈하고도 애잔한 웃음이 스치는 것과 풍철영을 위시해서 몇 명의 인물들이 들어 온 것은 동시였다. 들어 온 인물들은 많지 않았다.
광지선사와 홍칠공 노육, 그리고 파옥노군이 있었고, 철혈보 쪽은 육능풍과 반당, 그리고 진독수 뿐이었다. 그리고 송풍진인을 옆구리에 낀 조국명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다. 아마 이하 제자들은 밖에 남긴 모양이었다. 마노와 담천의를 확인한 풍철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노. 당신이 어찌 이런 짓을…."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마노의 냉랭한 음성이 그것을 잘랐다.
"풍장주는 지금 이 자리에서 노부와 따지자는 것인가?"
풍철영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일은 지금 따질 문제가 아니다. 나중에 그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는 흘낏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을 말해준 것일까?)
풍철영은 답답했다. 언뜻 보기에 말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말이 끊긴 것으로 생각되었다. 풍철영과 같이 들어 온 인물들은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보이는 태도에 오히려 당황했다. 분명 이 신검산장의 가정(家丁) 같은데 장주인 풍철영에게 오히려 윗사람처럼 말하는 것을 보며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은거고인일 수 있고, 어찌 보면 섭장천과 친구인 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 어떤 것을 가정하더라도 풍철영에게 호의로 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황이 좋은 쪽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지광계 부부가 죽어있는 것일까?
그 순간 담천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풀려 있어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움직일 때를 알았다. 얼마 전까지의 친구는 친구가 아니고, 적은 적이 아니었다. 모두 적일 수 있었고, 친구일 수 있었다.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처사였다. 그는 육능풍을 향하여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독고 소보주와 한 약속을 지키려 했지만 완전치 못한 이행이 되었소이다. 보다시피 이리 죽은 시신을 보내게 되었소."
담천의의 태도는 전날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풍철영 마저도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담천의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는 사실 조차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들을 수 있겠나?"
끼어 든 사람은 풍철영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예리했다. 그는 담천의의 태도와 말에서 조그만 단서라도 잡으려는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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