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좋아 산에서 삽니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08) 횡성 칠기 박병섭 장인

등록 2005.05.12 19:08수정 2005.05.1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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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들이 날뛰었다는 전재 고개


횡성칠기 박병섭 장인
횡성칠기 박병섭 장인박도
새말 나들목에서 안흥으로 가자면 매화산 전재고개를 넘어야 한다. 옛날에는 그 고개가 워낙 높고 험하여 지나가는 소장수를 노리는 산적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고개는 깊고 외진 곳이다.

그 산 아래 깊숙한 우천면 오원2리 별칭 '통골' 마을에 횡성칠기특산단지가 있다는 소문을 오래 전에 들었다. 호기심 많은 나그네가 늘 한번 들르고자 벼르던 터에 마침 날씨도 좋고, 신록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동행 기사 아내와 함께 찾아 나섰다.

안흥 내 집에서 42번 국도를 타고 전재 고개를 넘은 뒤, 매화산 주유소, 코레스코를 지나 우회전하여 좁은 길로 조금 달리자 그림 같이 아름다운 오원저수지가 나왔다(새말 나들목에서는 안흥으로 가다가 코레스코 직전에서 좌회전).

호수와 매화산, 풍취산의 빼어난 경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데다가 초록이 막 풍성한 잔칫상을 벌여놓은 그 언저리를 경이로운 눈으로 두리번거리자 페인트 냄새가 더덕더덕 나는 펜션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진을 치고 있었다.

이제는 산 좋고 물 맑은 골짜기는 거의 예외 없이 펜션들이나 위락시설들이 들어와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해치고 있다. 좁고도 험한 산길을 10여 분 더 달리자 바가지를 씌워놓은 돔 같은 건물 네 채가 나왔다. 거기가 바로 횡성 칠기 특산단지였다.


곧 모내기를 하려고 가득 담아놓은 무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요란하게 노래하였고, 그 개구리를 노리는 두루미가 낯선 나그네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긴 날갯짓을 하면서 산 아래로 날아갔다. 정말 첩첩산중, 오지중의 오지였다.

횡성칠기단지 전경
횡성칠기단지 전경박도
산이 좋아서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털보 횡성칠기장 박병섭씨가 반겨 맞아 주었다.

- 어찌 이런 깊은 산골에다가 터를 잡았습니까? 재료(나무)를 쉬 구하려고 들어오셨나 보지요?
“그보다는 제가 원래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곳에 들어올 때는 포장도 안 되었는데, 지금은 산길이 모두 포장도 되었고 인터넷까지 연결되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 손 전화는 터지지 않아요.”

칠기 전시실의 작품들
칠기 전시실의 작품들박도
먼저 그가 안내하는 전시실로 들어갔다. 나무 냄새와 옻 냄새가 은은히 풍겨나는 열 평 남짓한 돔 전시실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다갈색의 칠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스님의 밥그릇인 바루, 다기 세트, 주발 세트, 사각접시, 떡판, 삼족연회용 접시, 술병과 술잔, 제기 세트에 성당에서 미사 때 쓰는 포도주를 담는 성작(聖爵)에다가 납골함까지 있었다. 당신이 목각에서 칠기까지 전 과정을 다하기에 주문만 하면 무엇이든 다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다기 세트 (1)
다기 세트 (1)박도
거실 찻상에서 당신이 손수 만들었다는 솔 효소차를 마시면서 주인과 대담을 나눴다.

- 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제 고향은 전라남도 목포입니다.”

- 네? 목포 태생이 어찌 이 첩첩산중에 들어왔습니까?
“제가 산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큰형이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하고 난 뒤 강원도가 좋다고 거진에 정착하게 되어 어머니와 저도 강원도로 왔습니다. 오징어잡이 배도 사고 주문진에다 오징어 덕장까지 마련하였는데, 3년 만에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바다에서 큰형까지 잃어서….”

다기 세트 (2)
다기 세트 (2)박도
-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산' 격이군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지요. 그 뒤 어머니와 저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 무렵에는 다들 고생하였으니까 …. 봉천예고(안양예고 전신)에서 목공예를 전공했습니다. 사회에 나온 뒤 치악산이 좋아 원주로 내려와서 공방과 수석가게를 15년간 하였지요.

원주는 예로부터 옻 주산단지예요. 그새 원주 옻에 반하여 거기에 듬뿍 빠지게 되고, 마침내 서울농대 옻 연구팀과 함께 우리 옻 정제 방법을 개발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칠기공장을 차리자면 넓은 공간이 필요한데 돈도 없고, 산도 좋아서 1995년에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우리 부부에게 내놓은 찻잔이 모양새와 촉감이 좋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칠기의 좋은 점을 물었다.

“만져보다시피 촉감이 부드럽고 열전도율이 낮아서 뜨겁거나 차지 않습니다. 또 옻은 살충, 방부, 방충, 살균의 효능이 있기에 어떤 음식을 넣어도 쉬 상하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때부터 칠기를 쓰게 하면 성격도 부드러워지고 인성도 고와진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칠기를 많이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옻 예찬론

그는 옻 전문가답게 옻 예찬론을 펼쳤다.

“옻은 독성이 강한 나무로 피부에 닿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나무지만 인체에 더 없이 좋은 나무입니다. 옻을 약용으로 복용하면 만성 위장병, 변비에 좋고 수족냉증이나 생리통 생리불순 등 부인병, 간 기능 회복 신장병, 방광염, 오줌소태, 나쁜 어혈을 없게 해 줍니다. 옻나무에 다량으로 함유된 플라보노이드 성분은 숙취와 당뇨에 매우 좋고, 항암에도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 봄 옻의 새순을 따먹으면 장이 나쁜 이에게 엄청 좋다고 합니다.”

그의 옻 예찬이 끝이 없었다. "독은 인체에 해롭지만, 이를 잘 이용하면 더 없이 좋은 약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 기사를 보고 야생 옻나무가 남벌될 것 같아서 더 들은 얘기는 줄여야겠다. 내가 알기로는 옻나무를 함부로 만지면 심한 피부염을 앓게 된다. 옻나무를 잘 모르는 이는 옻나무 접근에 무척 조심해야 한다.

그의 작업실이 궁금해서 부탁드리자 그가 앞장섰다. 첫 번째 돔이 전시실이었고, 두 번째 돔이 목각 작업실이었다. 목각 작업실에는 나무와 목각기구로 가득 찼다. 세 번째 돔이 접대실 겸 칠기 작업실 겸 건조실이었다. 그는 가운을 입고 세 벌 칠을 한다는 찻잔 쟁반에 옻칠을 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부부 다기 세트
부부 다기 세트박도
조금 전에 차를 마셨던 부부 다기가 앙증스럽게 예뻐서 그 값을 묻자 한 벌에 12만원이라고 했다. 내 생각보다 값이 비쌌다. 그 영문을 물었더니 나무를 잘라서 석 달 정도 말린 뒤 성형하여 안에 12번, 밖에 12번 모두 24번이나 칠을 해야 작품이 만들어지기에 이 값도 싼 값이라고 했다.

그가 쓰고 있는 자그마한 붓의 재료는 사람의 머리털이라는데, 그 붓으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하여 칠을 한 다음 건조실로 보냈다. 건조실에서는 알맞은 온도에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 주면서 말려야 모양새와 빛깔이 제대로 나온다고 했다.

그저 일밖에 모르고 살아왔어요

장인(예술인)의 기본자세를 물었다.

“저는 오로지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저 일밖에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제 모든 걸 바치며 살았습니다. 다른 분은 목각이나 칠기 가운데 하나만을 하는데, 저는 목각에서 칠기까지 모두 겸해서 하고 옻칠 재료도 모두 제가 직접 정제해서 쓰고 있어요. 저처럼 우리 옻칠을 쓰는 곳은 전국에서 몇 집 안 될 겁니다.”

- 가족 소개를 해주세요. 그리고 자녀에게 칠기를 전수할 생각은 없습니까?
“집사람(김영옥, 41) 아들(현배, 13) 딸(현지, 10) 네 식구인데, 아들보다 딸이 더 칠기에 관심을 보이지만 지금과 같은 풍토에서는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칠기로 밥벌어먹기가 너무 힘들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장인을 천시하기에 아비가 적극 권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굳이 배우겠다면 하는 수 없지요.”

- 자신이 하는 일에 후회해 본 적은 없나요? 그리고 가장 어려운 점은?
“제가 좋아서 한 일이기에 후회해 본적은 없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일보다 사람 관계였습니다. 잘 아는 이에게 빚보증을 잘못 서서 지난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였습니다.”

주발 세트
주발 세트박도
당신이 만든 작품은 중간 판매상을 두지 않고 이곳에서만 판매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중간 상인이 엄청 이윤을 남길 뿐더러, 물건을 다 팔고 난 뒤에야 결재해 주기에 그들만 배불리는 것 같아서 판로에 애로가 많지만 직접 판매한다고 했다.

깊은 산속까지 찾아왔는데 점심 준비하겠다는 걸 극구 사양하고 일어서자, 그러면 오늘 아침에 일부러 뒷산에 올라가서 딴 두릅이라도 맛보고 가라고 살짝 데쳐 내온 것을 한 잎 맛보고는 일어섰다.

“우리 집 양반이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오늘 오시는 손님 점심 대접한다고 온갖 산나물을 다 뜯어왔어요.”

“다음에 와서 맛보겠습니다.”

막 차에 오르려는데 개구리들이 우리 내외에게 잘 가라고 “개굴개굴” 합창했다.

깊은 산골 오원2리 '통골' 마을
깊은 산골 오원2리 '통골' 마을박도

덧붙이는 글 | 횡성칠기특산단지 033-342-7654

덧붙이는 글 횡성칠기특산단지 033-342-7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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