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71

남한산성 - 잔나비의 사냥법

등록 2005.05.11 17:01수정 2005.05.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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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해 보이는 유백증을 보자 더욱 피가 솟구쳐 올랐다.

"저야 무슨 일이 있겠습네까! 다만 무모한 자의 소행으로 억울한 병사들이 수 백 명이나 죽었음에도 조정에서는 어찌 책임자를 문책하지 않는단 말입네까! 오랑캐를 물리칠 마음이나 있는 것입네까?"


장판수는 내친 김에 강화도로 피신하려는 임금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까지 얘기했다. 유백증은 그 말에 짐작이 간 다는 듯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나도 영의정이 무고한 초관을 베고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일은 알고 있네. 그렇지 않아도 강화도로 간 윤방과 함께 김류를 탄핵하려고 했네."

유백증이 남한산성에 있지 않은 윤방까지 탄핵하려 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였으나 실은 궁극적으로는 김류를 탄핵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자네는 칼을 휘둘러 종묘사직을 구하지만 난 붓을 들어 구하려 하네. 자네의 통분한 심정 십분 이해하지 이제 조정의 일은 내게 맡겨두고 나가보게나."

유백증은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상소문을 작성했다.


'...김류는 겁만 많고 꾀는 없으며 시기하고 괴팍스러워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있으며 정승으로 병권을 아울러 쥐어 뇌물이 그 집 문에 폭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적병이 치달려 와 육박했을 때 강화도로 행차하기를 청하며 상에게 몰래 떠나도록 권한 이가 김류입니다. 만약 상께서 성을 나갔다가 되돌아오시지 못했다면, 일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싸우느냐 화친하느냐를 결단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하고 적을 구경만 하면서 날짜를 보내, 군사들을 지치게 하고 사기를 저하시켰으며, 추악한 오랑캐에게 글을 올려 화친을 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따진다면 누가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이 두 신하를 주벌하고 또 애통해 하는 분부를 내려 사방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면, 큰 위엄이 저절로 수립되고 대의가 저절로 밝혀질 것이며 군율도 저절로 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생각건대 용기 있는 장사(壯士)에게는 관작을 내리신 후, 형세를 보아 야습하기도 하고 복병을 놓아 적을 섬멸하는 등 날마다 병사를 바삐 움직여 적도가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구원병이 대거 모이기를 기다려 성의 안팎에서 협공을 하여 한번 사생(死生)을 건 결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탄핵을 받은 대신은 형식적으로나마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는 법이었다. 탄핵 상소가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은 김류는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글을 올린 뒤 유백증에게 이를 갈았다. 이 소식은 산성의 한구석에 있는 안첨지에게도 전해졌다.


"그 자가 전에는 좌의정을 탄핵하다가 자신이 관직에서 물러나더니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구나. 소문에 듣자하니 고작 초관의 말을 듣고 탄핵상소를 올렸다지?"

안첨지의 말을 들은 두청은 껄껄 소리를 내어 웃었다. 민망해진 안첨지가 급히 웃음 사이에 끼어들었다.

"웃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관이 슬쩍 알려 주었는데 유백증의 상소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에 있었던 일도 적혀 있었다 합니다."
"걱정 할 것 없네! 꼬장꼬장한 관리와 초관 따위가 어찌 우리 일을 다 안다고 보는 겐가! 자네는 그저 이 일이 어찌 해결 되는가 조용히 지켜보기나 하게나!"

"하오나…."
"당장 물러가게! 여기는 보는 눈이 많네!"

안첨지는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러갔지만 그 날 저녁 무렵에서야 두청이 왜 그리 태연자약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유백증 이 자가 본시 그러했다하나 어찌 이리 방약무도하게까지 조정대신을 헐뜯는단 말인가! 유백증을 파직하고 이목을 북성의 협수사로 대신하게 하라!"

점심나절 유백증의 상소를 본 후 저녁의 어전회의에서 인조는 어명을 내렸고 이는 곧바로 시행되었다. 유백증은 분노했으나 어명을 거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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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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