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일찍 들어왔으면 될 거 아냐?"

[주장] 기수문화가 개그맨들만의 일인가

등록 2005.05.11 20:28수정 2005.05.1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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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동창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그 중 내로라 하는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직장 동료의 문병을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입사 동료가 직장 내에서 일어난 주먹싸움에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6주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가 덧붙인 말이 걸작이었다.

"맞은 애가 내 입사동기(6년 차)야. 때린 사람은 들어온 지 2년 쯤 됐고."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 얼마나 때렸기에…."
"내 동기가 그렇게 아래 기수 사람들 군기 잡는 걸 좋아 하거든. 누가 군 간부 출신 아니랄까 봐. 평소 '뻑'하면 옥상으로 집합 시키고 군대처럼 얼차려 주더니 된통 당한 거지. 때린 건 잘못한 거지만 내 동기도 잘한 게 없지."

친구의 말에 따르면 늘 군대처럼 집합 시키고 인격적인 모욕을 일삼던 그에게 결국 참다못한 아래 기수 중의 한 명이 달려들어 눈 깜짝 할 사이에 '박살'을 내 버렸다고 한다. 어쨌건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안 되지만 주위 사람들마저도 '당해도 싸지'라고 했다니, 평소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러며 친구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말을 곁들였다.

"대기업도 다 똑같아. 군대야, 군대. 거기도 옥상으로 집합시켜서 '한 따까리'야. 억울하면 회사 일찍 들어왔으면 될 거 아니냐고 하는 말도 군대랑 똑같아. 그래서 참다 참다 정 '뚜껑' 열리면 이번처럼 '황야의 결투'를 벌이는 거지. 결국 주먹이 주먹을 부르는 폭력의 확대 재생산이지. 하여간 이놈의 기수 문화…, 결국 사고가 난다니까."

친구는 혀를 끌끌 찼고 옆에 있던 은행에 다니는 한 선배는 "그런 건 어디나 다 비슷한 것 같다"며 "회사 생활을 해도 얼차려와 주먹싸움에 대비해 항시 운동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 날 자리에 모인 후배들이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고 제법 '덩치'가 있는 회사에 다니는 동창생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물론 그런 일이 항상 일어나지는 않지. 그런데 이 세상이 그렇더라. 기수가 최고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딜 가도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할 걸. 문제는 그 수단과 결과가 폭력을 동반한다는 거지."


대학, 지성의 전당이라고 다를까

나는 대학을 95학번으로 입학했다. 굳이 따지자면 89학번 나이지만 재수와 삼수를 거치고, 군대를 다녀와 스물여섯의 늦깎이로 다른 학교로 입학을 하게 됐다. 나이 어린 동기와 '선배님'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정말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같은 과에는 비슷한 과정을 거쳐 같은 나이에 입학한 남학생이 한 명 있었다. '동병상련'의 처지인지라 입학 초 종종 술잔을 기울이곤 했는데, 어느 날은 자신의 친구를 자리에 불렀다. 동갑이고 그 역시 제대 후 수능을 치르고 수도권의 한 공과대학에 1학년으로 입학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학교생활을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나이 어린 선배들이 '기수'를 들먹이며 꽤나 성가시게 군다는 것이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는 노릇인지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이 참으라고 달랬는데 1학기가 채 끝나기 전에 그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다섯 살씩 어린 동생들에게 '선배님'이라고 호칭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그런 그에게 반말은 예사고 심지어 후배들에게도 "동기생 사이니까 형이라고 하지 말고 반말에 이름을 부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후배들에게는 여지없이 각목을 동반한 무자비한 폭력이 돌아왔고 그런 행동을 말리던 그와 어린 선배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운동깨나 한 친구였지만 열댓 명에게 둘러싸여 별 수 없이 초주검이 되도록 맞았다고 한다. 어이도 없고 창피도 하고 결국 '절이 싫은 중'이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마지막 이야기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걔가 얻어맞는데, 동기인 동생들이 말리려 하니까 그 선배라는 애들이 그러더란다. '학교 다니기 싫은 새끼들만 말려! 한 발짝만 움직여 봐. 니네는 학교 못 다니는 거야!'라고. 야, 이거 대학생 맞는 거냐?"

물론 위의 경우를 두고 모든 대학을 일반화 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소위 '대학물'을 먹어봤다는 이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체대나 공대 재학생의 경우 군대 가보니 '학교보다 편하다'라는 농담이 나돌기 일쑤였고 고교 동문회나 지역 향우회의 경우 우의를 다진다는 애초의 취지보다는 '대가리부터 박고 들어가는' 신고식의 또 다른 형태였음을.

그릇된 문화, 대물림은 계속 된다

후배 개그맨을 폭행해 구속된 KBS 개그맨 김진철.
후배 개그맨을 폭행해 구속된 KBS 개그맨 김진철.KBS 제공
"개그계 폭행 관행은 사실이며 나도 신인 시절 몇 차례 폭행을 당했다."

개그맨 후배에게 폭행을 가한 혐의로 구속된 개그맨 김진철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억울한 마음도 있겠고 '혼자 죽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도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말하고 싶다. 우선 '무조건 잘못했다'고 엎드려 빌기부터 하라고.

백 번 양보해도 김진철은 할 말이 없다. 그리고 폭력 그 자체에 대한 벌은 엄중하고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뒷짐 지고 선 선배들은 책임이 없을까. 과연 그가 '학습 없이' 체벌을 배웠을 것이며 선배들의 압력 없이 '집합'을 시킬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나이도 형뻘인 사람을 단지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눈꼴시어 '한 따까리'할 생각을 먹게 됐을까?

그런데 조문식 KBS 희극인극회장은 11일 <스타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폭행 사건은 관행적이 아니라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개그맨들이 무슨 폭력 집단처럼 비쳐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황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의 이야기는 다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때린 것은 '이례적'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런 문화 자체는 이례적이 아니라는 것은 코미디 프로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지긋지긋한 서열˙기수˙패거리 문화를 걷어치우자

작년 9월 2일,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발표에 따르면 세계 70개국 만 20세 이상 성인 남녀 9939명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 '매우 공감' 100점, '전혀 공감 안함' 0점 등의 방식으로 점수화해 평균해보니 '부지런하다'(77.2점), '뛰어난 재능이 있다'(68.1점) 등 긍정적 평가가 나왔지만 '패거리 문화가 있다'에 대한 점수도 61.1점으로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이번의 사건이 '개그맨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은 절대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 조직이 있는 곳이라면 일어나는 비일비재한 문제인 것이다. 제 삼자의 눈으로 바라 본 객관적 모습이기도 한 동시에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서열˙기수문화는 단지 폭력을 수반하는 것 뿐 아니라 각 집단 구성원 사이에 소통의 부재를 가져온다는 점에서도 그 폐해는 심각하다. 부동자세의 아랫사람에게 '할 말 있으면 다 해 봐'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떤 의사소통을 기대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막힘없는 토론과 대화를 위해서도 조폭식의 서열˙기수문화는 바로잡아야 한다. 언제까지 그런 전근대적인 집단 주술에 걸려 소통 없는 세상에서 살아 갈 것 인가. 적어도 아이들에게만큼은 '한 따까리' 없어도 되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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