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진 않으나 저 편의 배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은 육안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럼 황기(黃旗)를 게양하겠습니다."
선장이 서문길에게 말했다.
"그리하시지요. 접선하기 전에 저 편도 황기를 올렸는지 꼭 확인하시고요."
서문길이 대답했다.
"선장, 포를 장전하고 위장한 채 대기하도록 하게."
"예, 이미 거적으로 덮고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그리고 점 초관, 흑호대 한 개 대(10명)는 상갑판에 남고 동이를 포함한 나머지 열은 선실 총안구에 배치하라. 내부에 사람이 있음을 노출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예."
"아 참, 선장. 눈치 빠른 아이 하나를 돛대 위에 매달아 감시토록 하고 선원들은 정위치 하도록 하게. 격군(格軍)들은 노에서 손을 떼지 말고 기다리라 이르고."
"예."
권기범의 지휘에 일사분란하게 각자가 자리를 잡았다. 이런 모습에 서문길과 일행만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 권 대장님. 이건 좀 심하지 않사옵니까. 마치 저들을 적국의 수군이라도 되는 양 대하시는군요. 미우네 고우네 해도 저들은 우리와 거래를 트고 지내야할 상단 입니다. 우리의 이런 반응을 눈치라도 챈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명을 철회해 주시지요."
"병장기를 노출시키지는 않겠소. 또한 저들이 무력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다만 만일에 대비하는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권기범이 설명했다.
"정 그러하시다면야…."
서문길은 말은 그리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내심 걱정스럽긴 한 모양이었다. 저편에서 이편의 무장상태를 알고 한 번 의심하면 앞으로의 거래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한 차례 부산한 움직임이 지나가자 선체에 다시 평온이 깔렸다.
한 시진쯤이 흘렀을까, 양편의 거리가 급격히 좁혀졌다. 이제 오 리가 될까 말까한 거리였다. 황당선도 이쪽의 연기를 보고 빠르게 근접해 왔던 까닭이었다.
"저쪽도 황기를 걸었습니다. 청국의 왕 대인 상단에서 나온 배가 적실합니다."
천리경으로 보고 있던 서문길이 말했다.
"좋아, 가까이 접근한다. 점 초관은 준비하도록."
권기범이 지시했다.
"전원 착검! 장전 확인! 장전된 총은 난간 밑에 뉘여라! "
점백이가 선실 안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명령했다. 선실 안의 동이도 나머지와 함께 준비했다.
좌우 각 다섯 개의 노에 각각 격군이 둘씩 붙어 스무 명이 내뿜는 땀 냄새 사이로 흑호대원 열 명이 끼워 앉았다. 각각의 총안구에 눈을 댄 채 밖을 응시했다. 여차하면 응사할 수도 있고 갑판으로도 뛰어 나갈 수 있는 자세였다.
비록 반수 이상이 구형 화승총이기는 했으나 격군들도 모두 개인 무장을 준비해 놓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싸움을 위해 배를 붙이는 것도 아니고 급히 배를 움직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므로 격군들은 노에 붙어 있어야 했다.
선실 안은 후덥지근했다. 땀이 흘러 자꾸만 눈을 따끔거리게 했다. 조선의 배치고는 작은 편이 아니었으나 화물실을 제외한 공간에 이 인원이 다 몰려 있자니 선실은 마냥 좁게만 느껴졌다.
개화군의 신형 대포를 선적하자면 굳이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대포를 함포로 적재하려면 선실 내의 대대적인 개수가 필요할 것 같고, 한 문 이상의 대포가 발사 될 경우 과연 이 배가 반동을 견딜 수 있을까도 의심스러웠다.
'하긴 그러니 소포 두 문을 이물과 고물에 설치했겠지. 괜히 그런 무장을 했겠어.'
동이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황당선이 접근하는 걸 지켜봤다.
"좌현 노 제거!"
얼마나 흘렀을까. 총안구로 밖을 내다보던 동이가 어느덧 거대하게 눈앞을 가로막는 황당선을 느낄 무렵 격군장이 소리쳤다. 예상대로 병조선은 좌현 접안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배가 완전히 접안하기 전에 총안구로 황당선을 경계했다. 그러나 배가 서로 근접할수록 총안구 앞 시야가 막혀 병조선보다도 높은 황당선의 난간을 견제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포가 장착됐을지도 모르는 포문 쪽을 반수가 견제하고 나머지는 상갑판으로 오르는 입구 밑에 대기했다.
"하온데, 이상합니다. 연기를 올린 거나 황기를 건 것이나 다 약조된 신호가 맞사온데…, 낯 익은 사람이 보이질 않사옵니다."
서문길이 권기범에게 나직이 말했다. 배와 배 사이가 겨우 이십여 보. 돛을 내리고 쇠갈고리를 던져 두 배를 붙이려던 참이었다.
"뭣이?"
권기범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권기범의 외마디에 갈고리를 던지려던 선원이 멈칫했다. 권기범이 빠르게 돛대 위에 매달린 수돌이를 응시했다. 수돌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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