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장서 눈물 흘리던 날

일곱 살 딸아이가 태권도 승급심사를 받았습니다

등록 2005.05.13 22:59수정 2005.05.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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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태권도 학원에 다녀온 딸아이가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자녀들이 그동안 태권도장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자신 있게 펼치는 날이니 바쁘시더라도 부디 부모님들께서 참석하셔서 아이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부탁한다'는, 2개월마다 실시하는 정기승급심사에 대한 가정통신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딸아이가 태권도 학원에 다닌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이면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딸아이는 그 후 함께 놀 친구가 없었습니다. 처음 이곳 시골로 이사를 왔을 땐 그래도 두 서너 명의 또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마저 올 초 내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선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부모를 따라 다들 떠나 버렸습니다.

이 시골마을을 떠나면서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서는 도시로 나가야 한다며 굳이 시골을 고집하는 저를 자식의 미래에 대하여 대단히 무관심한 부모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내 아이는 흙을 밟으며 들로 산으로 마음껏 달음박질치며 자연과 벗하며 자라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떠나버리자, 딸아이는 외톨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함께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아이와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며 다정하게 손잡고 시골 들녘을 돌아다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채 한 달도 안 되어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영 재미가 없었는지, 결국 아이는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오후 내내 무료해 하는 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바로 태권도 학원이었습니다. 딸아이는 키 큰 제 아빠를 닮지 않고 키 작은 저를 닮아서 또래들보다 좀 작은 편이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키가 작다는 이유로 크게 손해를 보고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딸아이만은 키 작은 여자란 소리를 들으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적당한 운동 하나쯤 시키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고, 만약 운동을 시키게 된다면 꼭 태권도를 가르치리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태권도는 신체의 손과 발 그리고 전신의 근육관절을 움직여서 하는 운동이라 신체를 강건하게 함은 물론, 심신을 수양하여 기술숙달을 통해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태권도의 기술체계와 운동형태는 신체의 각 분절을 좌우 균형 있게 구사하도록 짜여져 있어 인체관절의 유연성이 고르게 발달하도록 하기에 키 작은 아이들이 태권도를 하게 되면 키가 많이 자라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정보를 이미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어차피 학원에 보낼 바엔 영어나 미술이나 피아노 같은 걸 가르치자고 했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터득한 태권도에 대한 정보와 태권도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았고 또 딸아이이기에 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운동 하나쯤 익히는 것도 괜찮지 않냐며 끈질기게 남편을 설득한 끝에 결국 아이를 태권도 학원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권도를 배운 지 두 달.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태권도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매일매일 아주 즐거워하였습니다. 또 키가 쑥쑥 자랄 것이라는 제 기대감의 어리석은 발상인지 몰라도 요즘 부쩍 키도 많이 자란 것 같아 아이만큼이나 저도 내심 흐뭇해 하던 중이었습니다. 승급심사란 말에 근사하게 도복을 입은 멋진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미리 가슴이 떨려 왔습니다.


드디어 오늘. 애태우며 기다리던 승급심사를 보러 태권도 학원엘 갔습니다. 하얀 도복을 근사하게 빼입은 아이들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두 주먹을 무릎에 얌전하게 얹은 채 반듯하게 앉아 다른 아이들의 승급심사를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틈에 학원에서 제일 막내인 제 딸아이도 제법 의젓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의젓하게 앉아 언니 오빠들의 승급심사를 보고 있는 딸아이.
의젓하게 앉아 언니 오빠들의 승급심사를 보고 있는 딸아이.김정혜
드디어 딸아이의 차례가 되고 사범님이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딸아이는 체육관이 떠나가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제 이름을 외치며 씩씩하게 달려 나갔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흰띠를 다시 질끈 동여 매고 있는 딸아이.
제 차례가 되어 흰띠를 다시 질끈 동여 매고 있는 딸아이.김정혜
태권도를 배우는 목적을 외치는데 어디서 그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순간 깜짝 놀라기도 하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준비자세를 하고 섰는데 어찌나 씩씩하던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 왔습니다.

연이어 팔을 뻗고 다리를 뻗고 하는 일련의 순서들은 그저 언니 오빠들의 폼을 흉내 내는 정도였기에 구경을 하러 온 부모님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성함을 말하고 부모님의 생일을 말하는 순서에서 결국 전 눈물이 핑 돌고 말았습니다.

“저희 어머니 성함은 김 정자, 혜자. 김정혜 어머니이시고 생일은 1월 12일입니다.”

집에선 마냥 철부지인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인데도 기죽지 않고 엄마 이름과 생일을 저렇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똑부러지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딸아이가 "태권"이라 크게 외치며 그 작은 고사리 손으로 경례를 하는데 결국 벅찬 감동은 가슴으로 치고 올라와 눈물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태권도 학원에서 제일 막내인 창욱이와 함께
태권도 학원에서 제일 막내인 창욱이와 함께김정혜
두 달여. 제 딸아이는 태권도학원에서 육체와 정신을 골고루 살찌우는 참으로 좋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직 승급심사를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간 배운 것을 보여 드리고자 하셨다는 사범님의 말씀에 저는 자꾸만 목이 메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깊이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만 드렸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엄마를 향해 짓궂은 포즈를 취한 딸아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엄마를 향해 짓궂은 포즈를 취한 딸아이.김정혜
오늘 제 딸아이의 태권도 승급심사를 보면서 저는 절실히 느꼈습니다. 아마도 제 딸아이가 태권도를 배우면서 튼튼해지는 육체 못지않게 머릿속에도 더 많은 것들로 쑥쑥 채워져 분명히 정신건강도
토실토실 살찌워지리란 걸. 하얀 도복에 흰 띠를 질끈 동여 맨 제 딸아이의 근사한 모습은 아마도 오래오래 제 가슴에 깊은 감동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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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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