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이 돛 지기와 격군장에게 지시를 하고 요란을 떨자 다시 배안이 술렁였다. 돛이 오르고 노가 내려졌다. 그러자 갑자기 황당선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았다, 알았어. 100냥 쳐 준다. 근당 천은(天銀) 100냥을 쳐 주겠단 말이다. 젠장할!"
권기범이 서문길을 보며 씽긋 웃었다.
"선장, 저 배에 붙이게."
선장과 선원들은 항해 준비를 멈추고 노와 키만으로 황당선에 배를 접근시켰다. 선원 둘이 이물과 고물에서 각각 쇠갈고리를 던져 황당선에 걸었다. 황당선 쪽에서도 갈고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서서히 갈고리 줄을 당겨 두 배의 거리를 좁혔다.
쿵-.
두 배가 닿자 가벼운 충돌음이 들렸다.
서문길은 상단의 짐꾼들과 선원들에게 홍삼 짐바리들을 갑판으로 내오도록 지시했다. 황당선의 비단 옷 사내도 나머지 은 궤를 내오도록 했다.
황당선의 선장이 선실로 내려가는 선원들에게 작게 속삭였다. 중국어를 아는 서문길이 눈길을 돌린 사이라 안심한 듯 했으나 권기범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
'화(火)? 화총(火銃), 화창(火槍)? 불길하다.'
무슨 말인지 다 알 수는 없었으나 입 모양으로 한 단어만 눈에 들어왔다. 필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냄새가 났다.
"조금산이, 선실에 대기 중인 인원 중 마병총과 산총을 가진 자만 인삼 짐바리에 챙겨 나오라 일러라"
눈은 여전히 황당선의 선원들을 훑으며 가장 근처에 있는 조금산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조금산이는 침착하게 선실로 들어갔다.
권기범이 잽싸게 머리를 굴려봤다. 자신의 호위를 포함해 오혈포를 가진 자가 넷, 산총 넷, 마병총과 보총으로 무장한 흑호대원이 열 넷, 개성 상단의 화승총 호위 둘, 그 외에 두 문의 소포. 그리고 이십의 격군과 십 수 명의 선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비무장 대기 중.
저쪽의 선체가 두어 자 가량 높다하나 이 정도 병력이면 설사 저들이 딴 맘을 품고 있다하더라도 대거리를 해볼 만하다 싶었다.
개성 상단의 짐꾼 둘과 선원들, 그리고 흑호대원 몇이 짐바리를 지고 황당선으로 옮겨 갔다. 개성 행수 서문길도 넘어 갔다. 권기범도 호위와 함께 옮겨 타면서 품속의 비도를 확인했다. 총포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권기범이었지만 막상 자신은 손에 익숙한 칼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처지였다.
팽팽한 긴장 속에 황당선 갑판 위에 홍삼 짐바리들이 쌓이고 은 궤가 놓였다.
"짐을 풀고 홍삼의 수량과 품질을 확인해 보라."
서문길이 비단 옷의 청국 사내에게 말하고는 자기 짐꾼에게도 은 궤를 열어 확인토록 했다.
"하하하. 개성 상단의 물목이야 두 번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은 그리 하면서도 비단 옷의 사내가 저울을 내고 홍삼 짐바리를 풀었다.
그 때였다.
"대장님! 판옥 뒤에 무장 복병입니다요!"
병조선의 돛대에 매달려 파수를 보던 수돌이가 다급히 외쳤다. 동시에 갑판 위에 있던 청국 선원 열 두엇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총을 든 사수 대 여섯 명도 선실에서 갑판으로 통하는 문으로 뛰쳐나왔다.
바로 앞의 은 궤짝에서 황당선의 선장과 비단 옷의 사내가 뇌관식 쌍열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어!"
권기범이 품에서 날이 한 자 가옷 되는 비도를 뽑아 아래에서 위로 뿌려 그었다. 내처 앞으로 나서며 좌에서 우로 긋고 측면을 날카롭게 후볐다. 바로 앞의 선장이 팔과 가슴을 움켜지며 뒤로 누었다. 비단 옷의 사내도 옆구리를 움켜쥐며 권총을 떨어뜨렸다.
탕, 탕…타탕.
호위들이 오혈포를 꺼내 연이어 발사했다.
"아아악!"
선실에서 뛰쳐나오던 청국 선원들이 서넛 연이어 쓰러졌다.
땅, 따따다 땅.
선실에서 나온 청국선원들과 황당선 누대 뒤에 숨어서 있던 이들이 한꺼번에 방포했다.
"허억."
은 궤와 짐바리 사이에 미처 엎드리지 못한 개성 상단의 짐꾼 하나와 흑호대원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탕, 타다당, 탕….
병조선 난간에서 대기 중이던 흑호대원들이 일제히 응사했다.
"으아아---."
칼을 들고 앞으로 나서려던 자와 총을 조준하던 청국 선원들이 우수수 자빠졌다. 그 사이 짐바리에서 마병총과 산총을 꺼낸 흑호대원들이 정면에서 응사했다.
탕,탕, 타탕.
수평살이 여러 개 있는 중국 특유의 종범(縱帆)에 피가 흩뿌려졌다. 병조선 난간과 황당선 갑판 위 전체가 하얀 화연으로 뒤 덮였다. 피아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진한 연기였다. 그만큼 짧은 찰나에 수많은 방포가 이루어졌다.
"고물 쪽 선실 출구에 적병 다수!"
여전히 돛대 매달려 망을 보던 수돌이가 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연기가 아직 걷히지 않았지만 시계가 트인 위쪽에선 선실 출구 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전이 이루어지며 거적을 걷어낸 소포들이 고물 쪽을 지향했다. 피아가 뒤엉킨 갑판을 향하고서도 어쩔 줄 모르던 소포가 비로소 먹이를 찾았다는 듯 빙글 오른 쪽으로 돌려졌다.
펑.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앞서고 뒤 이어 하얀 화연이 전방을 뒤덮었다. 300여 개의 철환이 쓸고 간 자리는 처참했다. 황당선 난간의 방패 판이 깡그리 날아가고 갑판이 여기 저기 뜯겼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갑판 위로 대여섯 구의 시체가 형체를 알 수 없이 뜯긴 채 널브러져 있었다.
"전부 우리 배로 옮겨 타라! 소포의 발포 영역을 확보해줘!"
권기범이 연기 속에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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