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84회

등록 2005.05.17 08:03수정 2005.05.1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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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능풍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자신이 서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행동하기에 앞서 언제나 두 번, 세 번을 확인하고도 다시 또 한번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실행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수하들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라면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섭장천 일행을 따라 붙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막아서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조심스런 선택이 옳았다고 다시금 느껴지는 것이다.


섭장천 일행은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수십 번의 짧은 기습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대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고수였다. 특히 사십대 전후로 사내는 더욱 놀라웠다. 육능풍 자신이 맞붙는다 해도 절대 자신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알 수 없는 위엄과 신위는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그것과 같았다.

그 뿐이랴! 그의 곁에서 마치 암석을 깎아 놓은 듯 표정 하나 없이 완강한 태도를 보여주는 두 명의 흑의인들에게도 한계를 그을 수 없는 절정고수들만이 가진 기운이 일렁거렸고, 구파일방의 절기를 간혹 내보이는 일곱 명의 인물들 역시 손쉽게 상대할 자들은 아니었다. 또 한 가지 걸림돌은 뇌음사의 금존불(金尊佛)이었다.

아마 저들이 장안 외곽에서 철개장(鐵鎧掌) 곡첩(曲捷) 등 철혈보의 형제들을 죽인 자들일 것이다. 왜 곡첩 같은 인물이 당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의 무리를 지어 벌이는 혈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전체인원의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무공수위가 비슷한 절정고수들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다.

수하들의 죽음에 그 일행을 이끌고 있는 곡첩으로서는 자신을 상대하는 자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서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곡첩으로도 이삼십초에 승부를 가르기는 어려웠을 터. 자신의 수하들이 다른 인물들에 의해 쓰러져가는 것을 본 그로서는 더욱 무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저들 중 둘 정도만 협공했다면 곡첩으로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이번에도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철혈대가 와 주었다면 이렇게 시간을 끌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들의 인원은 기껏 오십여명 정도. 거기에 추관이 이끄는 수하 사십 여명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 상대할 인원은 채 열 명이 넘지 않는다.


추관이 이끄는 수하들은 저들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저들의 발을 묶는 정도. 결국 자신과 반당, 진독수가 저들을 없애야 한다. 물론 독고상천도 저들 중 한 명 정도는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철혈보의 독고가문에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지 못할 그들만의 독문검법이 있으니까.

은영전의 초산(草算) 역시 한몫은 할 것이다. 또한 원월만도(圓月彎刀) 좌승(佐承)과 그의 수하 네 명이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꺼림칙한 것은 섭장천이었다. 섭장천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람은 먹어야하고 배설해야만 한다. 하지만 신검산장을 떠난 후부터 이틀이 지나도록 그는 한번도 마차 밖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상했다. 섭장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멀쩡했던 그가 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분명 그는 저들과 따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무슨 변고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저들의 술책이라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자신은 그를 맡아야 할 것이고, 반당이 사십대 전후의 사내를 상대한다고 할 때 나머지 십여명 정도 되는 상대 고수들을 완벽하게 제압할 인물이라고는 만향지 진독수 뿐이다. 하지만 진독수 역시 금존불을 상대해야 한다. 독고상천과 초산, 원월만도가 제몫을 해주고 추관이 수하들의 희생을 막으며 버틴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해지기는 하겠지만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은 틀림없다.

그는 다시 망설였다. 아마 섭장천을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확신만 했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섭장천을 두고 누가 이길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있으랴! 패하지는 않더라도 그를 제압하기란 어려울 것이었다.

그럼에도 육능풍은 해야만 했다. 철혈보가 세워진 이래 고수하고 있는 철칙을 자신의 손으로 깰 수는 없었다. 후일을 도모한다는 것 역시 비겁한 일. 분명 차후에도 그들과 크게 마주칠 것이었다. 이미 저들이 누군지, 그리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풍철영의 귀띔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다 해도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또한 그것은 철혈보만이 아닌 무림인 모두의 힘이 합쳐져야 할 것이었다.

(광지… 그가 풍철영의 말을 듣고 그냥 돌아갔을까? 아니면 우리처럼 저들을 뒤쫓고 있는 것일까?)

광지선사 일행이 합세해 준다면 일이 쉬울 터였다. 하지만 그들이 철혈보에 손을 내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울좋은 정파란 이름 하에 그들은 마치 무림의 수호신이나 되는 것인양 거들먹거릴 줄이나 아는 작자들이었다. 하지만 육능풍은 분명 그들 역시 저들을 뒤쫓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만한 구파일방이 자파의 무공을 익힌 자가 여기저기서 살행을 한다는 사실을 안 이상 반드시 잡아들여 가던가, 그에 따른 혹독한 조치가 있을 것이었다. 설사 광지선사 일행이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이 일은 철혈보의 일이었고, 그 일은 구파일방의 일이었다. 중복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굳이 손을 잡을 이유는 없었다.

공격은 저들이 와호령(臥虎嶺)에 도착할 때 시작될 터였다. 와호령을 넘고나면 멀리 태행산(太行山)의 끝자락이 보일 것이었다. 와호령을 지나면 저들을 더 이상 쫒기 어려웠다. 그곳부터는 그들의 영역이었다. 시검사도가 나타난 이상 어떤 괴물들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은 저들을 갈라놓아야 했다. 두 대의 마차에 타고 있는 일행을 떼어 놓는다면 승산은 분명히 있었다. 육능풍은 생각에 잠겼다. 와호령(臥虎嶺)에 미리 보낸 추관이 모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 입구에서 가장 무식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두 마차를 떼어놓고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목표물인 마차 두 대는 끄는 말들 뿐 아니라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지쳐있을 것이다. 어제 밤에 한숨 자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늘 새벽부터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으니까.

--------------

조국명은 난감했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에도 사흘 동안 담천의의 행적은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로 인원을 풀고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했음에도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몇 군데 의심나는 인물에 대해 알려온 바는 있었다. 하지만 확인할 결과 아니었다.

결론은 그가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흘 동안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인맥을 통해 개방이나 천지회 쪽도 알아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담천의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감지되었다.

(왜 장주는 무엇보다 먼저 담공자를 붙잡아두지 못하는 실수를 했을까?)

사실 조국명 자신도 담천의가 그렇게 훌쩍 떠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 그리 아무도 모르게 떠난 것일까? 그는 왜 마노와 함께 섭장천에게 갔을까? 의문은 그의 머리를 맴돌고 있었지만 풍철영은 그에게 그 내막을 알려주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의 친동생같은 황원외나 두칠도 이번 일에 자신의 도움을 거절했다.

답답한 일이었다. 그 때였다.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백렴(柏廉)이 들어왔다. 두칠이나 황원외처럼 백렴 역시 자신이 친동생과 같은 인물이었다. 어렸을 적 그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밝고 굳은 심지가 있는 자였다.

"형님… 나타난 것 같소."

그는 오관이 뚜렷하고 사내다움이 넘쳤다. 생긴 것대로 여러 여자를 건드는 것이 흠이었지만 사내라면 그럴 수 있었다. 조국명의 시선이 홱 돌려졌다.

"이번엔 확실한 것이냐?"

"그는 이미 산서성을 넘어간 것 같소. 하남성 경계 제원(濟源) 외곽이오. 반점을 운영하던 부부가 피살되었소."

"피살…?"

조국명은 종전 몇 건과 똑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번 그런 일로 허탕을 친지라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자들의 짓이오. 아마 입막음을 한 것으로 보이오."
"그렇게 추측한 근거는?"

그럴 듯 해 보이기는 했지만 확인하고 나면 그들과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인도 해보지 않고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후에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전에 그곳을 다녀온 염효(鹽梟: 암거래 소금장사)가 있었소. 그의 말에 따르면 주인은 전날 밤 산 속을 헤맨 듯한 사내가 식사를 하고는 쌀과 아들 주려고 만들어 놓았던 옷을 사갔는데 꽤 묵직한 은덩이를 주더라고 자랑하면서 그 간 밀린 외상을 갚았다고 하오."

염효에게 자랑을 했다면 다른 손님들에게도 자랑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조국명의 계산으로 그곳은 이틀 동안 산을 탔다면 가능할 거리였다. 조국명은 흥미를 느꼈다.

"그 자의 모습에 대해서도 말한 것이 있었나?"
"그런 말은 없었소."

"도적이나 돈을 노린 자들이 저지른 일일 수도 있지 않나?"
"그 부부의 사인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미간에 홍점(紅點)이 있었고, 혀가 파랗게 변해 있었소. 암기에 의한 독살이오."

"으음… 남만(南蠻)의 청설독(靑舌毒)이군."

이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남만의 청설독은 죽은 뒤 혀가 파래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아마 비산(砒酸) 성분이 섞인 독이라 추정되는데 일각도 되지 않아 절명시키는 맹독이었다. 중원에서는 제조기법도 알려지지 않아 해독약도 없는 실정이었다. 중원에 존재하는 독문(毒門)이라 해도 이것을 사용하는 문파는 없었다.

가끔 전문적인 살수들이 남만에서 구해와 비침 등의 암기에 묻혀 사용하기는 했지만 구하기가 어려워서인지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더구나 미간에 홍점 하나라면 너무나도 깨끗한 솜씨를 가진 자들이었다.

"천지회에서도 은밀하게 뒤쫓고 있다고 연락이 왔소."

천지회까지 움직이고 있다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조국명은 불길한 예감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담천의에 대한 관심은 자신들 뿐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노리고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청설독을 사용하는 자들이라면 극히 위험했다.

(살수들일까? 사영천死影天? 아니면 살천문殺天門?)

더구나 전문 살수들로 보이는 자들이 그의 행방을 쫒고 있다면 긴박한 상황이었다. 확신은 없지만 그는 빨리 풍철영에게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곳으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46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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