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잡고 출퇴근하다

속죄할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인 것을...

등록 2005.05.24 12:57수정 2005.05.2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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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눈은 초점을 잃어갔다. 한 걸음 떼 놓기가 힘겨울 정도로 몸은 지쳐있었다. 그런 엄마를 억지로 차에 태워 함께 출근했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돌볼 사람이 없어 함께 출퇴근을 한 지 일주일이 됐다.


언니가 건강상의 이유로 낮 시간동안 엄마 돌보는 것을 중단한 두 달쯤 전부터, 엄마가 혼자 있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암묵적으로 내가 출근 전에 엄마를 돌보면, 언니가 오후 너덧 시간 돌보고 돌아가고, 동생이 퇴근하여 엄마의 저녁시간을 챙기던 지난 몇 달간의 질서가 깨져버린 것이다.

아침 식사와 약을 챙기고, 목욕을 시킨 후 열시가 훨씬 넘어서도 난 출근길이 주저됐다. 출근하고 나면 엄마 혼자 있어야 할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출근은 점점 늦어지고 할 일이 미루어진 까닭에 퇴근 역시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오지 않는 낮 시간, 엄마의 심리 상태가 나빠진 것을 생각해 또 점심도 조카 재형이가 간식 위주로 드린 것을 감안해, 동생이 가능한 제때 퇴근하여 저녁시간에 엄마를 챙기기를 바랐으나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엄마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만 갔다. 말수도 적어졌다.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하니 몸도 야위어 갔다. 가족이 어머니를 돌보는 게 소홀해 졌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엄마가 화장실 변기와 휴지 걸이 사이의 좁은 공간에 몇 시간씩 끼여 있던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화장실 사건'이후 엄마가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졌고 형제들에 대한 나의 분노도 커졌다. 그 작은 공간에 몇 시간동안 끼어 있다가 생긴 엄마의 멍든 손과 팔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엄마와 함께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나의 처지와 봄 행사로 일요일까지 출근해야 하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주말마다 외출하는 동생에 대한 서운함이 가득 차 있던 차에 발생한 '화장실 사건'은, 그동안 참아왔던 나의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분명 자신들의 엄마이기도 한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을 마치 '나의 엄마'를 대신 돌보아주는 듯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힘이 들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엄마 때문인양 내게 짜증을 내는 것도 더 이상 받아주기가 힘겨웠고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혹은 병원에 가는 일조차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부탁을 하는 것 또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참으면 엄마가 적어도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 돌아가실 때까지만 참자던 스스로의 약속을 지킬 자신마저 없어졌다.

화장실 사건 이후, 여러 상황과 맞물려 동생에게 분가를 요구했다. 나 혼자 엄마를 모시면 갈등과 혼란이 차라리 덜 할 것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엄마가 자식들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기는 했지만 나 또한 더 이상 혼자 삭이고 살다가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엄마와 나 그렇게 단 둘이만 남았다. 거의 1년 동안 동생과 그녀의 아들까지 네 명이서 살던 집은 휑해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24시간 엄마를 모시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어 버렸다.

큰언니를 대신해 낮 시간 돌볼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동생의 분가로 아예 상주하여 엄마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경제적인 부담이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쉴 수 있는 상황은 되지 못했다.

그러한 까닭으로 스승의 날 등 이런저런 일들로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모시고 출근하기 시작한 것이 1주일이나 되었던 것이다.

내가 일을 하는 곳은 화훼도매시장내 비닐 하우스촌이라 근무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그곳에 엄마를 모시고 와서 새벽 한 시가 넘을 때까지 일을 하니 나도 몸이 힘이 든데 엄마는 오죽했으랴.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 출퇴근을 하니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을 엄마는 과로에 감기와 몸살까지 겹쳤다. 그런 엄마를 이끌고 함께 출퇴근을 해야 하는 내 마음은 아프기만 했다.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다니며 식사와 약을 드시게 하고 사무실의 소파에서 혹은 행사를 하는 장소의 의무실에서 잠을 재워 엄마를 쉬게 해야 했다. 오줌을 싸는 것을 대비한 옷 보따리까지 나 역시 일하랴, 엄마 돌보랴 쉽지 않은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지친 엄마를 새벽부터 깨워 모시고 나갈 수가 없어 나는 아침 일찍 식사를 챙겨 드린 후 출근하여 일을 보고 점심때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 용인 집으로 돌아와 함께 모시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

환경의 변화와 정신적인 불안감은 엄마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수면부족까지 겹친 엄마는 걸음조차 떼어놓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무심코 새벽녘에 눈을 떴다가 눈동자가 고정된 채 몸까지 경직된 듯 움직이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난 순간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더 이상 모시고 출퇴근을 하였다가는 무슨 사단이 나도 날 것 같은 불안감은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엄마의 말을 다시 기억나게 하였다. 적극적으로 사람을 구하고자 이 곳 저곳에 부탁을 했다.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 채, 휑한 눈으로 멍하게 앉아 있는 엄마를 모시고 나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날은 행사가 시작되는 날이라 새벽부터 출근을 해야 하는 진퇴양난 자체였다. 난 힘들 때마다 아버지를 불러본다. 쉰둘이라는 나이에 너무나 일찍 세상을 뜨신 나의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남긴 짐을 대신 지고 있는 나를 좀 도와달라고.

나의 기원과 하소연을 아버지가 들으셨던지 사람을 구해달라고 연락을 해 놓은 인력사무실에서 사무실로 와보라는 연락이 왔다.

총알같이 찾아간 그곳에서 67살의 한 아주머니, 아니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너무나 급한 김에 면접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집으로 모시고 와 엄마를 부탁하고는 허겁지겁 출근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부모만이 자식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 또한 부모에게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2000년 3월 엄마가 쓰러져 3일 밤낮을 혼수상태로 있던 날 밤, 난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엄마가 돌아가시지 말고 깨어나게만 해 달라고. 그동안 살면서 엄마에게 그토록 못되게 군 내가 엄마에게 속죄의 갚음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시간만이라도 주기를 간절히 빌고 빌지 않았던가. 엄마는 지금 내가 그 잘못을 빌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다. 그것만으로 난 충분하다.

다른 형제들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변한다 해도 나 스스로에게 한 그 약속을 꼭 지킬 것이다.

내 가슴속 깊은 슬픔은 내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힘겨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멀어져가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나의 엄마에 대한 애잔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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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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