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온한 교사인가?

최근 청소년들의 사회적 발언과 우리 사회의 문화지체 현상에 대하여

등록 2005.05.19 20:19수정 2005.05.2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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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들의 성장과 방황을 그린 영화 ‘그로잉 업(Growing Up)’을 본 것은 기억조차 까마득한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영화 속의 십대 주인공과 같은 또래였든지, 그 시기를 조금 비껴간 대학시절이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그 무렵의 내 눈에 비친 영화 ‘그로잉 업’은 한 마디로 무지하게 야한 영화였다.

얼마 후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그로잉 업’의 몇 장면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야한 영화를 안방에서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한 영화평론가가 그 영화를 십대들의 에너지가 넘치는 ‘건강한 영화’라고 소개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뇌인지 가슴에서인지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충격과 이해’, 바로 그것이었다. 내 눈에는 야하고 불건전해 보이는 영화를 건강한 영화라고 소개한 영화평론가의 말이 먼저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와 동시에 나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건강하다’는 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싹튼 것이었다.

최근 입시문제를 둘러싼 청소년들의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학생들의 두발규제에 관한 문제도 하나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두발규제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들과 청소년단체 관계자들이 교육부총리 집무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머리 에 떠오른 것은 ‘건강하다’라는 단어였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머리나 길게 해달라는 아이들’이 건강하다니, 나는 혹시 불온한 교사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친하게 지내는 동료교사라도 청소년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로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불온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가령, 학교 간부 학생들이 교문에서 학생들의 가방을 뒤진다든지,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와 호주머니를 뒤지며 생활검열을 하는 것을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얘기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서먹해지고 만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색을 바꾸는 교사들도 있다.

‘모든 문화는 불온한 면이 있다’고 말한 시인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 오늘날의 민주국가, 즉 모든 공화국은 당시의 사회통념이나 이념적 잣대로 잰다면 인간의 불온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사실 아닌가. 문화의 이런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친한 동료교사라고 해도 대화의 장벽이 생기고 만다.

속내를 털어놓자면, 학교의 수직적인 명령체계와 비민주적인 관행에는 불끈하여 반발하면서도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에는 철저히 모르쇠하든지, 아니면 괘씸죄로 다스리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교사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인 셈이다.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왜 거리에 청소년들이 보이지 않는지 의아해한다고 한다. 그 시간 대다수 학생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의 과도한 교육열이 그들 눈에는 자연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청소년들의 성적(性的)호기심이 불건전하고 위태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희망자 조사를 할 때 나는 학생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거니와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도 싫기 때문이다.


“너 왜 멍하니 있는 거야.”
“저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냐고. 네가 원해서 학교에 남은 거잖아.”
“아닌데요. 선생님이 강제로 남으라고 해서 남은 건데요.”

자기 삶을 살고 있지 않는 듯한 이런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우리 교육의 위기가 동기의 위기요, 자발성의 위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런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나라의 백년대계가 심히 염려스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청소년이 주인이다’라고 외치는 그들의 당당하고 건강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꽃다발이라도 한 아름 안겨주고 싶은 나는 정녕 불온한 교사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18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일부 깁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18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일부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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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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