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레버도프의 저서 <비시민전쟁: 신엘리트가 파괴하는 민주주의>. 그는 이 책에서 엘리트주의가 민주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쳐왔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Taylor T.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어하는 '엘리트'라는 호칭이 미국에서는 피해야 할 '낙인'으로 인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4년 미대선 당시 케리 후보가 벗어 던지려고 안간힘을 쓰던 수식어가 바로 '엘리트'였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비엘리트'의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적지 않은 반사이익을 얻었다.
'엘리트'라는 용어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은 시민혁명을 경험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현대 미국사회에서 이 단어는 대선후보의 표를 좌우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프랑스혁명 당시 '엘리트'는 단두대 앞에 서야 하는 '죄목'에 해당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국민들이 되찾아오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이 '엘리트'라는 용어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국민들이 다스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 '위에' 서 있는 자들이 누구란 말인가?
소수의 인재가 다수를 먹여살린다?
한국에서 '엘리트'라는 단어가 갖는 독특한 의미 못지 않게, 한국의 교육기관과 기업들 역시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사회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살린다'는 구호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구호지만, 사실 이 주장은 서구사회에서는 감히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무엄한' 말이다.
무엇보다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인재'들이 속한 학교와 기업이 이끌고 먹여살릴 '밥벌레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터전이다. 한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은 그 '인재'들이 속한 교육기관에 물적, 인적 토대를 제공하고, 그들이 일하는 기업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사주고, 투자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엘리트'를 먹여살리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수사학의 차원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에서 기업과 학교가 져야 할 책임을 규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대학이 사회 없이 존속할 수 없다면 '사회환원'은 '자선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할 빚을 갚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시민들이 한 달만 물건을 사주지 않아도 도산할 기업들이 도리어 '국민들을 먹여살린다'고 주장하거나, 지역사회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교육기관들이 지역주민들을 이방인 취급해 오지 않았던가. 감사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두가 초대받은 '오픈 소스' 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