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 못 챙겨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제사를 지내지 못했습니다

등록 2005.05.20 08:40수정 2005.05.20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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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였다. 나는 새벽잠에서 깼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다. 거실이 환하다. 아내가 거실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밤새 자지 않은 모양이다. 아내 모습이 휑뎅그렁하다.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당신 밤새 자지 않았소?"

내 말에 아내가 한숨을 푹 쉰다. 주섬주섬 방바닥에 널려 있는 천들을 한곳에 모은다. 색실뭉치를 바느질그릇에 담는다. 요즘 아내는 천으로 손가방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며칠 전에도 한 개를 만들었다.

"아버지 제사도 잘못 알고 있는 제가 무슨 염치로 잠을 자겠어요."

아내는 다시 한숨을 내쉰다. 내 마음도 편치 못하다. 아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다. 사위인 내게도 책임이 있다. 나도 마땅히 장인어른의 기일(忌日)을 챙겼어야 했다. 아내는 일주일 전부터 장인어른 제사가 5월 19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제, 그러니까 5월 18일 밤이었다. 내가 막 잠자리에 들려 할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거실에서 휴대폰을 받는 모양이다. 얼마 안 가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나는 거실로 뛰어나갔다. 아내의 얼굴이 창백하다. 휴대폰을 쥔 손이 심하게 떨린다.


"뭐, 오늘이 아버지 제사라고? 내일이잖아? 아니라고? 식구들이 다 모였다고? 알았어."

아내가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막내처남이 우리가 연락이 없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를 본다. 아내가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이거 어떡하지요?"
"지금은 10시가 넘었소. 지금 출발해도 제사를 지낼 수 없소. 다음주에 장모님 생신이니 그때 찾아뵙도록 합시다."

나는 아내를 다독거렸다. 아내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장인어른 제삿날을 모르다니. 음력이라서 아내도 헛갈렸던 모양이다. 벌써 장인어른이 돌아 가신 지 8년째다. 그런데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장인어른 선조께서 심은 가지가 아홉 개 달린 '구송정'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장인어른이 몸소 돌보셨습니다.
장인어른 선조께서 심은 가지가 아홉 개 달린 '구송정'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장인어른이 몸소 돌보셨습니다.박희우
그 날 새벽이었다. 장인어른은 병원에 계셨다. 코에 호스를 꼽고 있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다. 양 볼이 홀쭉하게 패였다. 눈은 뜨고 있었는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초점이 흐려 있었다. 솥뚜껑만 하던 손은 이미 어린애 손이 되었다. 80㎏을 웃돌던 몸무게도 반으로 줄었다. 암이 장인어른을 저렇게 만들었다.

"젊은 양반, 객사는 막아야 하지 않겠나?"

같은 병실에 있는 노인이 내게 넌지시 말한다. 임종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의사도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노인이 나를 다그쳤다. 객사 또한 불효라는 것이다.

나는 장인어른을 바라보았다. 장인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던지 눈자위가 바짝 말랐다. 장모님도 셋째처남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장인어른을 들쳐 업었다. 어린애처럼 몸이 가볍다.

나는 병원을 나서며 자꾸만 울었다. 이제 당신의 외손녀 겨우 세 살이다. 귀하신 딸을 내게 주신 장인어른이시다. 당신께서는 몸소 못난 사위를 점찍으셨다. 나는 가난했고, 서른여덟의 노총각이었고, 등기소 하급직원이었다. 그런데도 장인어른은 내 중매를 자청하셨다. 민원인을 가장해 등기소에서 몇 번씩이나 나를 훔쳐봤다고 했다.

아내와 내가 결혼하는 날 장인어른은 중절모를 쓰고 예식장에 나오셨다.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때 장인어른 머리카락은 암으로 다 빠져 있었다. 결혼식 내내 장인어른은 웃음을 흘리셨다. 그 기뻐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미안하오. 나도 잘못 알고 있었소."

나는 억지로 아내를 방으로 데려갔다. 아내에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아내가 마지못해 자리에 눕는다. 나는 베란다로 나왔다. 아직도 새벽이다. 가로등 불빛이 밝다.

나는 죄스러움을 느낀다. 사위도 자식이다. 장인어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나다. 그런데도 장인어른 돌아가신 날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만한 불효가 또 어디 있을까. 불효자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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