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회관이나 이장댁에 자체 발전기를 이용하여 마을마다 마이크를 설치하여 방송을 했으니 누구 집에 전화가 오는지 마을에 무슨 소식이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엔 마을 앞 미루나무에 한개, 뒷 철룽에 각각 한개씩 있었지만 만날 고장이었다.김규환
2인 1조로 선생님이 급파되어 마을마다 방송을 하고 돌아갔다.
“6학년 남학생들은 모두 피신하기 바랍니다”
여태껏 학교가 생긴 이래 이런 적이 없었다. 마을이 생긴 뒤로 선생님께서 직접 마을 방송 마이크를 잡은 일은 없었다. 이제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상급생들에게 학교에 나오지 말라니! 웬일일까?
산감(山監)이 나와도 나뭇짐을 산에 버려두고 오면 그만이다. 밀주(密酒)를 담갔다가 단속원에 걸려도 “제사 모시려고 그랬다”던가 오히려 막걸리 한 주전자 따라주어 어찌어찌 피해왔지만 학생들에게 학교에도 오지 말고 집에도 있지 말란다.
숨으라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영문을 몰라 쩔쩔 맸다. 한때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 우리 집에 빨치산 도당사령부가 며칠 머물렀지만 마을만 세 번 타고 대포와 총알이 빗발치듯했지만 큰 인명 피해 없이 무사했던 집안이다.
지긋지긋한 전쟁과 빨치산 활동이 끝난 뒤 일부러 산에 불을 지른 아이들 빼곤 감옥갈 일이 없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아닌가. 6학년 40명 내외의 학생 중 당시에 키가 제일 컸던 두 살 위인 내 형이 주범자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품앗이를 갔다가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셔서 형 손을 이끌고 참난쟁이, 감난쟁이를 거쳐 검덕굴 산 쪽으로 사라졌다.
“엄마!”
“성”
“암말 말고 있그라와~.”
“잉.”
“애할매집에 갔다글지 말고?”
“절대로 아무 말 말고….”
걱정스런 마음으로 등교를 하였다. 곰곰 생각해보았다. 공부가 될 턱이 없었다. 얼마 전 3학년 시험을 한 학년 위였던 우리가 봐준 것도 아무 문제가 아니었는데 남학생 모두를 학교에 나오지 말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오후가 되어서 곡성군 삼기면 수산리 외가에 형을 데려다 준 어머니께서 돌아오셨다.
대체 우리 형들이 뭘 잘못했을까. 선생님께 여쭤보려고 해도 워낙 학교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하고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입 한 번 잘못 뻥끗했다가 형들이 모두 징역살이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으로 살이 떨리고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의좋은 형제가 되라고 그리 말씀하셔도 골목대장인 형이 나를 물들지 않게 하려고 했던 건지, 동생인 내가 있으면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인지 만날 따돌리는 통에 우린 싸움박질 깨나 했지만 하루 이틀 사흘을 넘기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형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다가 성아가 잽혀가믄 큰일인디’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사이 학교와 마을엔 문제의 학생들을 잡으러 왔는지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쩌다 함지를 인 생선장수 아주머니나 아이스깨끼장수, 엿장수, 땜장이, 튀밥 튀는 할아버지, 소쿠리장수가 다였던 마을에 양복을 빼입은 간첩인지 누군지 모르는 젊은 사람들 두셋이 조를 짜서 들어온다.
마을이 술렁여도 반상회를 열어 입단속을 단단히 했지만 “김규복 학생 알아요?” 그때마다 “몰라라우”라거나 “왜 물으신다요?” 하며 말문을 닫으면 “박정환이는요? 이 학교 6학년이고 이 마을에 산다는데요” “바쁘당께라우. 딴 데 가서 알아보싯쇼”하고 말문을 닫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