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장군 할아버지 곁에는 두 명의 무서운 아저씨가 있었다. 장군 할아버지께 극진히 대하는 아저씨들이지만 스님들은 물론 노스님까지도 공손하게 대했던 아저씨들이었다. 그 아저씨 중 하나가 사람보다 큰 바위를 번쩍 들어 올리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장군 할아버지와 그 아저씨 둘이라면 그러한 악귀들이라도 물리칠 것 같았다.
(그 아저씨들… 오늘 아침에 과자 사주겠다며 나갔는데….)
아이는 내리는 눈을 맞자 피부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침에 아저씨 둘이 여기서 나간 것을 기억했다. 아저씨 들은 가끔 그렇게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곤 했는데 언제나 등 뒤에는 자기들보다 더 큰 짐을 지고 왔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자신에게 줄 과자가 들어 있었다.
아이는 눈에 미끄러져 뒤뚱거리면서도 대웅전 뒤로 돌아가 암자로 향하는 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파르고 눈이 쌓여 걷기 힘들 자 기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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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암자의 지붕 위에서 움직이지 않은지 꽤 지났다.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는 대가로 푹신한 눈 이불을 덮을 수 있었다. 그는 숨도 조금 그리고 가끔씩 쉬었다. 그렇게 호흡을 하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몸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른 쪽 눈알 하나뿐이었다.
지붕 위에서 두 개의 대롱으로 구멍을 뚫어 하나는 입에 물고, 또 하나는 오른쪽 눈에 대고 그 대롱을 통해서 암자 안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노리는 그가 왔고,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 이미 자신의 동료가 당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틀릴 것이었다. 어느 한 순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숨에 저자의 목숨을 앗아가 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남만의 묘족들이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나 대롱을 통해 쏘아지는 비침은 너무나 정확했고, 소리가 없었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눈을 감고 쏘아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고, 제대로 모르는 무림인들이 치를 떨면서 청설독이라 부르는 이 독을 묻힌 비침은 그를 일각 안에 다른 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자신들에게도 해독약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맞기만 하면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대롱을 통해 보는 암자 안은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적은 부분. 강중장군의 시체가 있는 부분이었다. 만약 그가 그 방원 안에 모습을 보이면 입에 물려 있는 대롱 속의 비침은 소리 없이 발사될 터였다. 사람은 한번 쯤 시신을 살피기 위해 그 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헌데 이 자는 암자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그 방원 안에 들어오지 않았고, 들어오자마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는 듯 하더니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 자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다면 움직일 것이다. 그의 죽어있던 전신세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 왔다. 호흡을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독문심법도 몸이 긴장되기 시작하자 더 많은 공기를 필요로 했다. 오른쪽 눈알이 빠질 듯 아팠지만 그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 깜짝하는 것도 멈추려고 했다. 정말 기회란 눈 깜짝할 사이에 왔다가 가버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좀 더 많은 양의 공기가 필요해 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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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천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견해 낸 형상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天>
강중장군은 공격을 당한 후 바로 죽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상처 난 등을 방바닥에 대고 몸을 움직였던 것 같았다. 일직선으로 조금씩 밀고 나가자 등에서 나는 피는 하나의 글자를 만들었고, 그것은 한 일(一) 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그 아래에 큰 대(大) 자로 누우려 노력했던 것 같았다. 그러자 하나의 글씨가 새겨졌다.
-- 바로 하늘 천(天) 자였다!
너무나 정확했다. 죽어가면서도 머리마저 똑바로 세우려 노력한 것이 바로 저 글자를 나타내기 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만족스럽게 죽은 것 같았다.
(왜…?)
왜 죽어가는 그 순간에 저 글자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그리고 저 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을 나타내기 위하여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저것을 만들어야 했을까? 자신을 죽인 흉수를 뜻하는 글자일까?
또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남겼을까? 무엇을 전하려고 남긴 것일까? 저 글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죽어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만들 글자라면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을 터였다.
왜?
그리고 어떤 의미일까?
또한 누구에게 남기려 했을까?
아무리 다시 보아도 분명 <天>이 분명했다. 비록 이쪽저쪽 피가 튀고, 끌린 자국은 있었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담천의는 조금씩 보는 각도를 달리해 보려고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찬바람과 눈발이 날려 들어왔다. 그리고 한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담천의의 움직임을 멎게 하였고, 그가 모르는 가운데 그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되었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담천의와 아이는 둘 다 놀랐다. 아이가 암자까지 와 문을 여는 순간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부친의 초상이 걸려 있는 가운데 죽어 있는 강중장군과 그가 남기려했던 그 형상에 너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무림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충격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아이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담천의가 또 한번 놀란 것은 그 아이의 전신이 온통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몸을 감싸고 있던 회색 승복은 이미 홍색 승복이라 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마가 깨졌는지 아니면 피가 묻어 흘러 내렸는지 모르지만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핏줄기와 손에 묻은 피는 아이의 전신에 붉은 물감을 들여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 비친 담천의도 다를 바 없었다. 천왕문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 피와 오른쪽 허벅지에서 흘러내린 피는 발까지 적시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앞에는 자신을 지켜 주리라고 믿고 있던 장군 할아버지가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눈도 감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담천의의 모습은 스님들을 죽이던 그 악귀들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제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갈 힘도 없었고, 그 보다 지금 죽은 것 같은 할아버지를 깨우고 싶어서였다.
“할아버지… 장군 할아버지….”
아이는 장군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안아줄 것 같았다. 아이가 암자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무섭지 않았다. 악귀도 무섭지 않았고, 귀신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를 죽인 이 악귀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악귀의 얼굴이 누구를 닮은 것 같았다.
아이는 벽에 걸린 족자의 얼굴과 담천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이는 그제서야 다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족자에 있던 귀신이 뛰쳐나온 것일까?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
“악---! 귀… 귀신….”
하지만 그 비명과 함께 담천의의 옆으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천정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툭--!
담천의의 신형이 망설임 없이 천정을 향해 쏘아갔다. 한줄기 검광이 천정을 꿰뚫었다.
쇄액---파파팍---!
천정이 뚫어지며 핏줄기가 눈위에 흩뿌려졌다. 그의 신형은 빠르게 천정을 뚫고 지붕위로 올라섰다. 희끗한 음영이 움직이며 어둠과 눈발 속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사내는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아이만 들어오지 않았어도 저 자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긴장을 하다보니 입으로도 숨을 쉬게 되었고, 그 안에 있던 수분이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이로 인해 물방울이 생기며 떨어진 것은 정말로 재수 없는 일이었다.
담천의는 내심 자책하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암영을 뒤쫓기 시작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담천의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과 혼동에 빠져 주위에 누가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죽음과도 직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도망가는 암영을 잡아야 했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아이는 갑작스럽게 악귀가 천정을 부수고 올라가자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장군 할아버지한테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도 죽음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깨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할아버지… 할아버지… 일어나… 일어 나라구….”
처음으로.... 그 무서운 일을 당한 그 때부터 너무 무서워 울지 않았던 아이의 볼에 눈물이 타고 흘렀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에게 장군 할아버지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아이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 법이다.
“아파? 할아버지 많이 아파?”
방바닥에 온통 물들일 피는 할아버지의 피였을 것이다. 아이는 나뭇가지에 긁혀 피가 나도 매우 아픈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할아버지는 너무나 아플 것이다.
뚫려진 천장 사이로 눈발이 날려 들어오고 있었다. 열려진 문에서도 찬바람이 불어왔다. 단 위에 켜 놓은 촛불이 꺼질 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는 장군 할아버지가 죽었더라도 자신을 안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누워있는 장군 할아버지의 가슴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제 48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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