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인사 좀 하고 살자

[사는이야기] 아이 인사시키기

등록 2005.05.27 00:26수정 2005.05.2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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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애는 동네 어른들을 보고도 인사를 잘 하지 않았다. 동네 어른들도 하도 만성이 되다보니 으레 저 녀석은 인사를 하지 않는 아이로 치부하였다.


그러면서 아이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당신들이 먼저 " 아이구 00님 안녕하십니까?"하면서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인사를 받으면 녀석도 인사를 먼저 하지 않은 자신이 민망한지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안녕하세요?"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지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어릴 때도 그랬는지. 물론 가만히 생각하니 그렇게 하기도 한(?)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난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오며가며 열심히 인사했다.

그래도 쑥스러움이 뼛속에 새겨졌는지 아이는 엄마를 따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생긴 대로 살게 내버려 두기도 하고 때로는 타이르기도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세월이 지나면,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나아지겠지.'

그러나 말짱 도루묵이었다. 억지로 시키면 며칠 하다가 이내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던 차에 무심코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다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녀석을 보았다. 선생님이 먼저 내려서 아이들이 순서대로 내리는 것을 돕고 계셨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내려서 순서대로 선생님 앞에 서 있었다.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 서로 "안녕히 가십시오"를 주고받는 듯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마무리 순간을 녀석은 전혀 행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핑 달려와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선생님은 "천천히 조심해서 가세요" 혹은 "00아, 인사하고 가야지" 등의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뺀질뺀질한' 뒷모습을 보이며 발칙하게 걸어갔다.

소나무 숲길과 산책하는 사람들
소나무 숲길과 산책하는 사람들정명희
돌이켜 보면 6세 때도 그런 적이 많았지만 저도 나이를 먹었으면 뭔가 변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제자리 걸음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처방'을 내려보기로 하였다.

"00아, 오늘 유치원 버스에서 내릴 때 친구들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선생님에게 인사하고 왔니? 엄마랑 약속했잖아."
"응, 하고 왔다."
"하기는 뭘 해. 엄마가 저번처럼 베란다에서 우연히 보니 하지 않고 냅다 달려오던데?"
"…."
"약속대로 내일 엄마랑 '체험 삶의 현장'하러 가자.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입에 익지 않아서 그런 모양인데 내일 유치원 가지 말고 엄마 따라 뒷산에 오르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인사하는 거다. 하다보면 인사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구나.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 환하게 해주는 거구나 하고 저절로 느낄 수 있을 거야."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녀석은 '설마 엄마가 유치원을 보내지 않을 리가'하는 것 같았다. 천만에.

그리하여 어제 하루 유치원에는 하루 쉰다고 말하고 아이와 산행을 했다. 사실 인사도 인사지만 동네 뒷산의 산책로가 아름다워 녀석에게 한번쯤 보여주고픈 생각도 있었다. 휴일이면 가끔 가서 노닐다 오는 산이기는 하지만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종주'를 해본 적은 없었다.

물론 주말에 '종주'를 해도 되지만 동생과 함께 하게 되면 내가 전하고픈 얘기를 잘 전달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요한 가운데 온전히 녀석에게만 집중하면 뭔가 '소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름의 속셈이었다.

그렇게 하여 오르게 된 오월의 뒷동산은 참 아름다웠다. 잎이 무성한 아카시아 숲길은 아카시아 숲길대로, 또 터널을 이룬 소나무 숲길은 소나무 숲길대로 나름의 향기를 내뿜으며 아침 햇살 속에 저마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힘이 들긴 하지만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힘이 들긴 하지만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정명희
아이는 어쩌면 엄마가 자기를 '완전히' 골탕 먹이려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럴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다정히 대했다. 또, 아이는 아이대로 뜻밖에 자연이 주는 교향악에 동화되어 한 시간 반의 산행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억지로 마지못해 인사를 하는 듯했는데 인사를 받아주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들이 "아이쿠, 씩씩하니 잘 걷네"하시면서 즉각적이고도 상상 이상의 미소와 추임새를 넣어주시니 녀석도 신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풍경이 좋은 곳에서는 사진도 곁들여 주었다. 뿐인가. 하산하고 내려와서는 마트에 가서 녀석이 그토록 원하던, 걸으면 불빛을 내는 샌들과 맛있는 먹을 것을 사주었다. 속으론 '저도 양심이 있으면 이젠 인사 좀 하고 살겠지'하면서.

집에 와서 최종 점검을 하였다.

"00아, 내일 엄마랑 산에 한 번 더 갈래? 아니면 유치원 가고, 대신 인사 잘 할래?"
"유치원 갈래."
"인사는?"
"…할게."

대답이 용수철처럼 바로 튀어 나오지 않아서 나는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인사를 하면 나도 상대방도 기분이 금세 환해진다는 것을 네가 아직 제대로 못 느꼈나 본데. 느낄 때까지 산에 갈래? 엄마는 네가 타인을 배려하는 아이로 크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어."
"아이구, 알았어, 알았다니깐."

아이가 약속을 잘 이행할지 아니면 금방 까먹고 나 몰라라 할지 아직은 미지수다. 그러나 어쨌거나 전날 산행은 참 좋았다. '인사'를 떠나서 아이의 기억 속에 자연의 아름다움이 새겨져 이 다음에 두고두고 하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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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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