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장 영결무정유(永結無情遊)
똑같았다. 처음 그녀들을 납치할 때와 똑같이 그는 그녀들을 관석당 저택의 별원에 데려다 주었다. 납치되었던 그 시각과 돌아 온 시각도 비슷했고, 시녀 둘이 그 자리에 그렇게 점혈되어 자신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도 똑같았다.
조사를 위하여 별원은 전혀 치우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그곳을 나갈 때와 하나 변함이 없는 모습으로 그대로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잠시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세계에 갔다 온 것도 같았다.
"그럼 이만…."
등자후는 두 여자에게 포권을 취해보였다. 언뜻 송하령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애잔한 빛이 스친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고, 그녀들 역시 특별히 할 말은 없었다. 자신들이 돌아 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일각 후에 시녀들은 점혈에서 풀려났고, 그녀들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그녀들은 열흘 내내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매번 같은 질문에 그저 미소만 지어야했다. 그녀들 역시 사실 자신들을 납치한 그 자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한편 그녀들이 돌아 온 바로 그 시각, 개봉의 다른 곳에서는 희고 가는 손 하나가 서찰을 펼치고 있었다. 개봉 최고의 기루 청화원 안이었다. 자신이 보낸 서찰과 형식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청화원주 친전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면 달이 거닐고
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는구나.
醒時同交歡 함께 즐거이 술을 마시고
醉後各分散 취하면 각자 헤어지는 것.
永結無情遊 무정한 교유를 맺었으니
相期邈雲漢 다음엔 저 은하에서 우리 만나세.
용문장주 배상>
이름을 밝힌 것도, 그리고 그 말미에 하얀 연꽃 한 송이를 그려 넣은 것도 자신의 이름과 함께 목단화 세 송이를 그려 보냈던 것에 대한 답례인 모양이었다. 그가 두보(杜甫)의 몽이백(夢李白)이란 시에서 따온 여섯 구절을 보냈듯이 그에 대한 답 글로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중에서 그 일부인 여섯 구절을 따서 보낸 것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두보나 이백이 시성(詩聖)이니 시선(詩仙)이니 불리는 최고의 시인인 것도 같았고, 그들의 작품 중 널리 알려진 두 작품 중에서 골라 보낸 것도 다름이 없었다.
그 의미도 자신이 보낸 서찰만큼이나 명백했다. 이미 송하령과 서가화는 관석당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쪽으로 보낸 것도 상대가 자신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뜻.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들이 움직인 것은 당연하지만 서운하다는 의미였고, 서로 간 예의는 지켰으니 이만 끝내자는 말이었다.
친구도 될 수 있고, 적도 될 수 있으나 그저 만나면 술 한 잔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손을 잡고 같이 나아가자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공존하자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찌되던 저 세상에서만큼은 서로 싸우지 말자는 의미였다.
유곡은 이들이 생각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 구절이야 어지간히 배운 자라면 골라 보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적절하고 댓구가 되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 함축적인 의미가 자신의 것과 전혀 다르지 않게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에게 분명 뛰어난 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기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세력이 이처럼 우후죽순처럼 커갈 수 있었으랴. 그는 송하령을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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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두 사내가 좀 늦었던 것은 눈 때문이었다. 그들이 용화사 천왕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뇌리에 파고드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은 시신을 살펴보는 것 보다 먼저 양 어깨에 짊어진 보따리를 던졌다. 그리고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은 경내를 맹렬하게 달리면서도 주위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는 너무나 고요했다. 그들은 선방을 지나면서 불길한 그 느낌의 정체를 알았다. 어둠 속에서도 문이 열려 그 속을 볼 수 있었던 그들은 죽어있는 용화사의 승들을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은 더 이상 주위를 살피지 않고 더욱 맹렬하게 달렸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한 사람 뿐 이었다. 장군. 그들이 노주(老主)라 부르는 강중장군이었다. 그들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자신들이 모시는 그 분은 너무나 불쌍한 분이었다. 과거의 일에 매달려 스스로 자신을 조금씩 죽이고 있었던 분이었다.
그들은 대웅전을 살펴보지도 않았다. 마치 설원을 나는 야조처럼 그들은 암자로 향하는 길을 타고 올라 암자 앞에 다가갔을 때 그들이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암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방안에는 자신들이 모시는 장군이 큰 대자로 누워 있음을 보았다. 장군의 가슴 위에 아이마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상황은 짐작되었다. 흉수는 장군을 살해하고 천정을 뚫고 사라진 것 같았다. 한 사내가 몸을 가볍게 뛰어 지붕 위로 올라가고 한 사내는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지붕 위로 올라간 사내는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인적은 이미 없었다.
하지만 지붕 위의 상황은 눈이 쌓이고 있음에도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두 명의 흔적이었다. 한 명은 오랫동안 지붕 위에서 엎드려 있었는지 하체 부분의 모양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족적이 다른 두 명의 인물들은 급하게 서쪽으로 향한 것 같았다. 노주를 살해한 인물은 두 명으로 추정되었다.
사내는 다시 지붕에서 내려와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종륜(宗侖). 명이는 다친 데가 없이 말짱하네."
아이를 안아 든 사내가 말했다. 피범벅이 된 아이에게 상처가 하나도 없음을 살피고 한 말이었다. 종륜이라 불린 사내는 들어오자마자 기이하다는 듯 암자 안을 살피고 있었다. 왜 아이는 살려 두었을까? 오년 전 자신들이 데려 온 아이였다. 오늘과 같이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나갔던 그 때에 저잣거리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는데 아이는 지치고 굶었는지 죽어가고 있었다. 부모를 잃어버린 것인지 그들 부모가 버렸는지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아이를 그냥 두고 올 수가 없어 데리고 온 아이였다.
아이는 천성적으로 귀여웠다. 더구나 저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 정말 잘했다고 생각이 든 것은 그들이 모시고 있는 장군의 태도였다. 아이를 데려오기 전까지 웃음은 고사하고 말조차 하지 않았던 장군이 어느 때부터인지 아이를 보며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가끔 아이를 안고 산을 오르는 일도 있었다.
아이는 장군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랐고, 장군은 아이의 이름을 명이(明二)라고 지어 주었다. 장군의 아들이자 자신들이 존경하는 한 사내의 이름에다 이(二)를 붙여 두 번째라는 의미로 지어 준 것임을 모를 바 없었다.
"노주…!"
종륜은 죽어 있는 장군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안한 모습으로, 아주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해탈한 장군의 시신 앞에 자신들의 불찰을 속으로 빌었다. 언제나 그들의 호위를 부담스러워했던 장군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자신은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그래서 저렇듯 만족스럽고 평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일까? 그는 죽음에 앞서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 역시 장군의 시신과 핏물이 나타내는 한 글자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하늘 천(天).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항인(恒寅). 잠시 이리와 보게."
항인이란 사내는 아이를 안고 아이를 깨우고 있었다. 아이는 혼절했는지 아니면 지쳐 잠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직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안은 채 종륜에게 다가갔다.
"노주께서는 글자를 남기시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오기를 기다려 한 종륜의 말에 항인 역시 노주가 만들려했던 글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왜 저 글자를 남긴 것일까?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 아이의 눈이 힘없이 떠졌다. 하지만 눈동자가 똑바르지 않고 입에는 비틀린 듯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명이야… 정신이 드느냐."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명이를 안아주지 않아…."
아이의 불안정한 눈길이 바닥에 있는 시신을 향했다. 또 다시 아이의 몸에 경련이 일었다.
"할아버지… 죽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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