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다르다고 초라하게 모셔져 마음 아팠다"

파주 보광사에 비전향장기수, 공동 묘역 조성

등록 2005.05.29 01:16수정 2005.05.2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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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양심을 지키려 수십 년의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하거나 출소 뒤 운명을 달리했던 비전향장기수들. 그동안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장기수들의 묘역을 한 곳에 모으는 작업이 첫걸음을 시작했다.

통일광장과 실천불교전국승가회(아래 승가회)를 비롯해 각계 단체 대표와 회원 60여명은 지난 27일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 '비전향 장기수 영면지'인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 준공식을 열고 고인들의 넋을 기렸다.

통일애국투사 묘역 연화공원 제막식이 엄숙하게 거행됐다.
통일애국투사 묘역 연화공원 제막식이 엄숙하게 거행됐다.이민우
이날 참가자들은 보광사 영각전에서 일문 스님(보광사 주지, 승가회 집행위원장)과 금재성 선생(1998년 8월 별세), 최남규 선생(1999년 12월 별세), 정순덕 선생(2004년 4월 별세), 손윤규 선생(1976년 4월 별세), 류낙진 선생(2005년 4월 별세), 정대철 선생에 대한 추모천도제를 올린 뒤, 묘역으로 이동해 준공식을 거행했다.

경과보고를 맡은 통일광장 권낙기 공동대표는 "묘역 조성은 사실 하나의 역사이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말문을 연 뒤 "그 동안 통일을 위해 각 분야에서 여러 분이 활동하신 결과 1989년부터 장기수 선생들이 출소했지만, 출소 후에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고생하던 중 민가협을 비롯한 사회단체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시대상황에 따라 비석에 하고 싶은 말도 못한 채 이름만 적기도

"감옥에서도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지만, 출소란 이름으로 사회에 나와서도 양로원 등에 보내졌던 분들이 기구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시대 상황에 따라 비석에 하고 싶은 말도 못한 채 이름만 적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일문 스님이 이데올로기를 떠나 이 땅에서 한생을 치열히 살아오신 분들을 소홀히 모실 순 없다고 해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권낙기 공동대표는 "실천불교승가회뿐 아니라 보광사의 모든 분들을 가슴 속에 잊지 않겠으며 민가협 어머니들과 맺은 의리도 지키며 나아갈 것"이라면서 "6·15공동선언에 따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의 길로 나아가도록 힘쓰자"고 힘주어 말했다.


통일광장 임방규 공동대표는 인사말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과 마주하니 가슴이 아프지만, 한편으로 일문 스님과 권낙기 선생 등 여러분이 애써 이토록 아늑한 공원을 꾸리게 돼 기쁘기도 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우리는 저자들에 의해 흩어졌다 때론 철창 안에 모이기도 했으며 여러 형무소에 갈라 놓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가 우리 뜻에 따라 선생들을 모셨습니다. 앞으론 결코 헤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임방규 공동대표는 "올해는 분단 60년을 연장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 민족의 힘을 모아내 반드시 외세, 미국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면서 "우리는 빈말이 아니라 조건이 어렵더라도 난관을 헤쳐나가는 자세로 힘있게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념 다르다고 초라하게 모셔져 있어 마음 아팠다"

파주 보광사 주지인 일문 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엔 이념의 울타리가 없음을 강조했다.
파주 보광사 주지인 일문 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엔 이념의 울타리가 없음을 강조했다.이민우
이어 보광사 주지인 일문 스님이 승가회 쪽을 대표해 간단하게 인사말을 했다. 일문 스님은 "힘들게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이념이 다르다고 초라하게 모셔져 있어 마음이 아팠다"면서 연화공원 조성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뒤, "앞으로 1년에 한 번씩 추모 천도제도 마련하여 추모의 뜻을 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가협 임기란 고문은 추모사에서 "곳곳에 흩어져 계셨던 분들을 모아 친근한 마음으로 자주 뵐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면서 "통일을 위해 살아 생전 온갖 탄압 속에서 양심을 지켜오신 분들은 영원히 우리가 싸울 때 존경하고 사랑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이종린 명예의장은 "경기도 보광사 이땅은 미제국주의가 점령하고 있는 점령지인데, 우리가 동지들을 이곳에 모셔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뒤 "반드시 진정한 우리 조국땅에 모실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명복을 빌었다.

"이 자리는 비록 작지만 어느 국립묘지보다 의미가 크다"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의장은 "이 자리는 이름 그대로 우리 민족의 통일 애국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영면지로 비록 작지만 어느 국립묘지보다 의미가 크다"고 지적한 뒤, "우리 조국의 북쪽마저도 군사패권주의 모략을 다하여 붕괴작전을 펴고 있는 상태"라며 "지금은 민간단체의 남북공조뿐 아니라 정부 당국도 남북공조를 해 미국의 전쟁책동을 막아내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노수희 공동의장은 "장기수 선생들의 통일광장과 민가협, 유가협 3대 조직이 우리 민족의 희노애락을 대표하는 결정체"라면서 "그동안 전국연합과 범민련이 진작 이렇게 모시는 일에 신경 쓰지 못한 일이 송구스럽다"고 말한 뒤, "앞으로 더 이곳에 모신 분들을 찾아 모시는 일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참가자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들의 넋을 기리며, 통일조국 건설에 앞장설 것임을 다짐했다.
참가자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들의 넋을 기리며, 통일조국 건설에 앞장설 것임을 다짐했다.이민우
추모사가 끝난 뒤, 비전향장기수이며 시인이기도 한 양희철 선생의 추모시 <살피시옵길> 낭독이 이어졌다.

신록 우거진 이 오월 좋은 날
새 터전 마련하고
님들 앞에 자랑스러움으로 섰습니다.
금재성 동지
최남규 동지
손윤규 동지
정대철 동지
정순덕 동지
류낙진 동지
동지들께서 이 곳 자리 잡으셨기에
새롭게 유택을 꾸리고 넓혔습니다
흩어져 계신 동지들, 이 곳
연화대 동산으로 모실겁니다.

(중략)

동지들이시여!
지금 이 자리, 비록
장엄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아늑하고 포근합니다.
정성어린 마음 마음이 모여 만든
동지들의 안식처입니다.
계명산 울울이 푸르르고
연화대 잔디 곱게 펼쳐지리다
통일된 조국강산에 아름다움으로 보태시리다
편히 쉬시옵소서.


이어 노래패 '아름다운 청년'이 추모곡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부르자, 분위기는 한결 더 엄숙해졌고, 참가자들도 함께 추모의 뜻을 담아 노래했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대도 헤어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 사람 나는 못잊어-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 사람 나는 귀중해-


묘역에 있는 비석들, 만들어진 시기와 때에 따라 모양은 물론 비문 내용도 다르다.
묘역에 있는 비석들, 만들어진 시기와 때에 따라 모양은 물론 비문 내용도 다르다.이민우
해마다 4월 1일에 추모 천도제 올리기로

한편 통일광장과 승가회는 앞으로 전국 곳곳과 교도소 등지에 흩어져 있는 비전향장기수 묘소를 연화공원으로 이장해 민주주의와 통일을 상징할 수 있는 공원을 조성하고 해마다 4월 1일에 추모 천도재를 올리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손윤규, 정순덕, 류낙진 선생의 기일이 모두 4월 1일이라 이날로 정한 것이다.

아울러 통일광장과 승가회는 남북평화협상을 통해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은 물론 유해송환운동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통일광장 임방규 공동대표는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 선생의 묘비를 쓰다듬으며, "인간이 살면서 참 여러 고비를 겪겠지만, 정순덕 선생만큼 많은 고비와 역경을 넘어온 분은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통일광장 임방규 공동대표는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 선생의 묘비를 쓰다듬으며, "인간이 살면서 참 여러 고비를 겪겠지만, 정순덕 선생만큼 많은 고비와 역경을 넘어온 분은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이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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