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잎 역광, 렘브란트 뺨치네

[무형문화재 다시보기 10 : 민화 ②] 너무나 재미있는 민화 읽기

등록 2005.05.29 18:22수정 2005.05.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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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는 이른바 정통(무엇이 정통인지 애매하지만) 화가 또는 선배 민화작가들로부터 '지도 편달'을 받거나 후세 미술사가들의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했기에 그 분류 갈래도 정설이라 할 것은 없다. 그러나 유파의 분류는 회화 연구의 필수 작업이다.

구체적으로 합의된 통설은 아니나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화조(花鳥)화, 어해(魚蟹)화, 책거리 그림, 문자도 등으로 분류한 안휘준(서울대·문화재위원장) 교수의 민화 분류법은 거의 정설처럼 쓰인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화조화, 동물화'가 될 가회박물관의 병풍 그림 중 하나는, 민화를 대하던 필자의 시각을 한 순간에 '창작성의 상종가(上終價)'까지 올려놓은 '선생님 같은 그림'이었다.

정말 흥미로운 '마음대로 민화 읽기'

a 역광을 받은 단풍잎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그림. 가회박물관 소장.

역광을 받은 단풍잎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그림. 가회박물관 소장. ⓒ 가회박물관

가회박물관에 전시된 8폭 병풍 중의 한 폭 상단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보고 놀라던 느낌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 이유는 이 그림 속엔 '역광(逆光)'이라는 창의적인 시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민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어지는 도화서 화원들의 영향도 아니다.

대상의 외형 묘사에 충실하던 '그리기'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광선에 의한 대상의 미적 변화'에 주목한 것과, 이를 느낌에 머물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하려 시도했다는 점이 놀라웠던 것이다.


이는 기존 상식을 뒤집어본다는 '역(逆)발상'의 하나라 볼 때, 민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계급 타파의 저항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빛의 화가'였던 렘브란트가 정작 살아서는 자신의 그림을 인정받지 못했듯이 이 민화 작가도 천대받는 '환쟁이'였을 것은 분명하다. 또 렘브란트 그림의 핵심이 '빛의 감각적 흐름'이었던 것처럼, 이 민화를 이해하는 데는 '단풍잎을 투과한 광선의 미'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니 필자가 이 그림을 보면서 화폭의 느낌이야 다를지언정 서양의 화가 렘브란트를 떠올린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렌즈를 통해 나타나는 미감각에 눈을 조금 떴다 싶을 때 가을날 풍경 촬영을 나가면, 역광을 받은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직감적으로 느끼며, 특별히 지시하지 않아도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려 애쓴다.

그러나 역광의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터득 되는 것은 아니다. 단풍을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일종의 미적 교감이다. 대상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의해 생성된 미감각인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며 민화에 담긴 중요한 정신의 하나이다.

a 이 땅에 사진이 들어오긴 전에 윤곽이 배경에 스며드는 사진 기법을 민화에서 먼저 쓴 증거가 되는 부분.

이 땅에 사진이 들어오긴 전에 윤곽이 배경에 스며드는 사진 기법을 민화에서 먼저 쓴 증거가 되는 부분. ⓒ 가회박물관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역광을 받은 단풍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단풍잎의 끝 일부는 배경에 빨려든 듯 흘러들어갔다.

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며 거리에 사진관이 생기며 일반 상류계층에서 초상화 제작 대용으로 사진을 이용한 것은 20세기 초이다.

그러나 이 때는 '사진이라는 희한한 그림'이 얻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던 시절이었다. 역광을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았고 설사 필요했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로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 그림은 민화의 표현기법상 치졸을 문제 삼아 민화를 정통 회화의 서자로도 취급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결정타를 날릴 자료가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보인다.

카메라라는 도구로 노출과 초점을 인위적으로 적절히 변형시켜서 얻는 역광 사진을, 사진의 존재를 모를 때 민화에 회화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 민화 작가는 천부적 감각으로 역광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림 한 폭을 예로 든 것이지만, 이쯤 되면 민화란 애당초 창작 정신이라곤 없는 '뽄그림'이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되어버린다.

정통 미술사적 관점에서 민화를 다루기 어렵다?

a 8폭 병풍 중 펼쳐 전시된 4폭 부분. 가회박물관 소장.

8폭 병풍 중 펼쳐 전시된 4폭 부분. 가회박물관 소장. ⓒ 가회박물관

가회박물관 소장의 이 병풍은 작품 제작 시기와 용도 및 작가가 분명한 작품으로, 민화의 상징하는 말처럼 되어버린 '작가와 시기를 모르는 것이 민화'라는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자료가 되는 민화이다.

이 병풍의 끝 폭에는 '세정축모춘천도교종암지해김성립사(歲丁丑暮春天道敎宗庵智海金成立瀉)'라고 적고 낙관을 찍었다. 이것은 "정축년 늦은 봄에 천도교 종암인 김성립이 그렸다"는 뜻으로, 대부분 민화가 제작 시기와 작가 자료 등이 불분명하여 계통 파악에 애를 먹는 현실에서 귀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천도교 서울교구에 확인한 결과, '종암(宗庵)'은 천도교단 내에서 통용되는 이름이란다. 불교로 치면 '법명(法名)'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종암'이란 한자(漢字)의 구성이 교단의 통상 작명 관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천도교 혼란기에 지어진 이름으로 추측된다는 답을 들었다.

a 부분 확대도. 냇물가의 아기 곰은 입에 가재를 물고 있다.

부분 확대도. 냇물가의 아기 곰은 입에 가재를 물고 있다. ⓒ 가회박물관

국내외 상황, 천도교단의 시대적 위치, 병풍에 적힌 내용 등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1937년도의 작품이 거의 확실하다. 대개 민화는 막연히 시대와 작가를 짐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은 그림의 배경 실체가 확실한 흥미있는 경우가 아닐 수 없다.

민화는 족보가 불분명한 잡그림이라는 말은 적어도 이 경우엔 전혀 틀린 말이 된다.

또 민화에 곰이 등장하는 것은 처음 보는데, 이 그림을 소장한 가회박물관의 윤열수 관장도 민화 내에서는 유일하게 본 곰 그림이라고 했다. 병풍에 적힌 대로 '~천도교~~' 부분과 천도교의 정신적 근원 중 하나인 단군을 연결시키면 곰의 등장 이유는 곧 이해된다. 이 그림의 바로 오른쪽 폭에는 역시 단군 신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호랑이가 그려 있다.

민화는 단순히 생활에 활용하기 위한 장식 목적의 그림이 많았지만, 이 그림의 경우 종교적 목적으로 민화를 그려 사용한 확실한 예로서 민화의 사용 용도에 대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실제 굿당 등 민간 신앙에서 자주 이용하는 산신도 등에는 민화적 요소가 짙다.

무조건 국적, 작가, 시대 불명의 그림이라 하지 마라

앞에서 예로 보인 단풍잎 역광 표현 시도의 창작성이나 뒤에서 예로 든 병풍 그림의 뚜렷한 정체성은, 민화가 유파도 없고 작가도 모르며 시기 구분도 불분명한 '잡그림'이라는 일부 평자들의 획일적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중요한 자료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유사한 자료가 적지 않게 수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연구 중이긴 하지만 일부 민화 작가는 유파와 계보, 주 활동 지역까지 파악되고 있으며 그들이 매우 계통적으로 활동한 사실도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 중의 하나인 민화의 연구는 아직도 황무지에 가깝고, 어정쩡한 의미의 '민화'라는 이름을 대치할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아쉬운 대로 '민화'란 용어도 계속 쓰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 이름을 지은 이후에도 긴 수면에 들어가 있던 민화는 '조자룡'이란 기인(奇人)의 공로로 조금씩 미술품 대접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업적을 바탕으로 민화의 체계적 연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소한의 문화적 자존심도 없이 앞으로도 계속 '민화는 족보도 없는 잡그림'으로 홀대하면서 전문가를 자칭한다면, 조만간에 그는 1980년대쯤에서 미술사 공부를 그친 사람으로 홀대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뽄그림'이 청와대 영빈관에 걸려있다?

덧붙이는 글 | 무형문화재 다시보기(11) - 민화 (하)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무형문화재 다시보기(11) - 민화 (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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