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마주 하는 산, 천마산을 오르다

▲ 환삼덩굴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실잠자리 한쌍 ⓒ 김선호

베란다 문을 열면 겹겹이 늘어선 산 능선 중 그 중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진 산이 보인다. 수도권에서는 꽤나 이름 있는 산으로 불리는 천마산이다. 그렇게 앞에 두고도 몇 번 정상 근처를 맴돌았을 뿐 끝까지 가보지 못한 산. 그래서 항상 우리집 베란다 문을 열 때마다 아쉬움을 갖게 만든 산이었다.

오늘은 정상까지 가보리라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것도 몇 번인가 올라가 보았던 묵현리 코스가 아닌 호평동에서 오르는 정식 등반 코스로.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들을 앞세우고 천마산으로 향했다.

요즘 호평동은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아파트 단지가 천마산 능선을 다 가릴 정도로)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 아파트도 많다. 때문인지 길도 매우 복잡했다. 더군다나 산을 알리는 이정표가 전혀 없어 입구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앞에 산능선이 바라다 보이는데 입구를 몰라 헤매다니….

주변 분들에게 물어 천마산 입구에 도착하니 산 입구 주변이 참 소박하다. 길 오른편으로 제법 우렁찬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도 있다. 입구 주변에 음식점이 몇 개 있을 뿐 변변한 편의점 하나 없는데 오히려 한적해서 좋다. 물과 간단한 간식을 싸오길 잘했다 싶었다.

산 입구부터 울울창창한 숲이 반겨 준다. 어떤 등산 코스를 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산이 그렇게도 달라 보인다는 사실이 놀랍다. '산행하기에 좋은 꽤 괜찮은 산'일 뿐더러 갖가지 야생화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산이라는 입소문을 산을 오르면서 확인하는 기쁨. 가까이에 이렇게 멋진 산이 있음은 분명 행운이다.

▲ 2005년 5월 천마산 계곡 ⓒ 김선호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울창하게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다. 잣나무, 소나무와 갖가지 활엽수들이 아름드리 들어서 숲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고 그 사이 사이를 마치 골목길이 들어서 듯 계곡물이 흘러 가고 있다.

산길을 따라 가는 동안 줄곧 계곡물 소리가 따라 왔다. 숲이 울창하니 물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이치. 산새들 소리도 그침없이 들려 온다. 산 입구에서 시작된 포장길을 따라 가다 갈림길을 만났다. 간단하게 포장된 등산로가 앞쪽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고 또 다른 길은 계곡 쪽으로 난 흙길이다.

갈림길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는 할머니 두분께 방향을 물어 보았다. 다리가 아픈지 정강이께를 주무르고 계시는 할머니가 "계곡길은 힘들어. 편하게 포장길 따라 쭉 가면 돼" 그러자 바위께에 엉덩이를 걸치고 계신 다른 할머니가 얼른 말을 자른다. "아이고, 만날 다니는 시멘트 길을 여기에 와서 까지 뭐하러 다녀. 몸에도 좋으니께 흙 밟고 계곡 따라 가봐."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 우리는 흙길로 가라는 할머니 말씀을 따라 무성한 나뭇잎으로 가려져 있는 흙길로 들어섰다. 계곡을 건너 숲으로 들어서니 어찌나 나무들이 울창한지 한낮인데도 숲길이 어두컴컴하다. 무성하게 잎을 돋아낸 나무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나무 터널을 만들었다. '삼림욕'이라는 말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숲 향기 가득한 길이다.

나무 터널 바로 아래는 계곡이라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물소리는 여전히 카랑거리며 흐른다. 물이 풍부하니 이곳 저곳 약수터도 유난히 많다. 물론 이 산에서 가장 유명한 돌핀샘을 만나려면 한참 멀었지만 물맛 좋고 시원한 약수터가 중간중간에 포진해 있어 목이 마를 새가 없다.

"야, 아이들이 산을 참 잘도 오르는구나." 간간히 마주치는 등산객들의 칭찬에 고무된 아이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산을 오르는 일보다 집에서 컴퓨터게임을 하는 것이 더 좋은 아이들. 마지 못해 따라 왔던 아이들이 등산객이 무심코 던진 칭찬 한마디에 더 씩씩한 모습으로 산을 오른다. 컴퓨터 게임에 대한 생각은 일찌감치 벗어 버리고 푹신한 흙길을 걸으며 산새 소리와 물소리에 젖어 산길을 걷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숲과 참 잘 어울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부디 자연과 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들로 자라거라'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 산길을 헤매다 만난 산목련꽃의 우아한 자태 ⓒ 김선호

태조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어떤 산을 만났는데 의외로 산세가 험하고 높아 손을 석자만 벋으면 능히 하늘을 만질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천마산'이 되었다는 산. 그런 산인 만큼 이 산을 오르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천마산은 울퉁불퉁 돌멩이가 솟아올라 아이들이 걷기 쉽지 않은 산이다. 그런데 이제 갓 걸음걸이를 시작한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작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는 모습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산은 줄곧 가파르게 이어지다가 산 중턱에서부터 조금씩 완만한 길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부터는 산 아래 숲을 채우던 침엽수림 대신에 참나무들로 이루어진 활엽수림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침엽수로 이루어진 숲에서 나는 향기와 활엽수림이 내뿜는 향기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본격적으로 들꽃들이 무리져 피어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곳에 앉아 다리쉼도 하고 간식을 먹기로 한다. 오늘 간식은 한창 제철인 참외다. 깨끗이 씻어 가져온 참외를 통째로 베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참외의 풍부한 수분을 함유한 단맛이 산행에 기운을 더해 준다.

다시 산행을 계속하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택의 갈림길이다. 다행히 비는 가늘게 내렸고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마저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들이 가려준다. 우산을 받칠 필요도 없지만 우산은 산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정상을 향한 여정을 계속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 탓인지 숲의 초록은 짙어지고 향기 또한 진하게 퍼진다. 비오는 날 산행도 또다른 맛이 있다. 우산 대신 모자를 눌러 쓰고 산길을 바삐 걷다 보니 천마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돌핀샘이 나온다. 산 중앙에 턱하니 커다란 바위가 들어 앉아 있는데 그 아래 숨겨 놓은 듯 샘 하나가 보인다. 퐁퐁 샘솟듯 바위 틈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리듬을 타듯 떨어져 내린다. 방울 방울 바위틈에서 떨어져 내린 물이 샘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바위 틈에 몰래. 마치 여기까지 오르느라 고생했다고 어루만지듯.

맛 좋은 약수로 목도 축였으니 다시 길을 재촉한다. 돌핀샘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벼랑길 같은 험한 길이 이어졌다. 두발뿐만이 아니라 두손까지 총동원해서 산길을 어기적거리며 오른다. 여전히 빗줄기는 가늘게 내리는 중이다. 빗줄기가 굵어지면 바위 아래서 비를 피하기도 했다.

내려오다 만난 등산객에 의하면 '오백걸음'만 가면 만날 수 있는 정상을 향한 걸음을 계속했다. 가파른 산길을 악전고투하며 오르다 보니 어느 저점에서 에둘러 가는 길이 보이고 피었다 지고 있는 연분홍 산철쭉 행렬도 보인다. 아, 드디어 정상이구나 싶었는데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이제는 숫제 바위돌이 가로 막는다. 밧줄을 타고 비가 내려 미끄덩 거리는 길을 오르는 일이 쉽지가 않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아득한 벼랑이라 다리가 떨려 와서 망설이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씩씩하게 앞장 선다.

먼저 정상을 밟은 이들 틈새로 '천마산 해발 812.3m'라고 쓰인 푯말 앞에 선다. 푯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찰칵, 사진 으로 기념 말이 들어 오고 비에 젖어 촉촉한 천마산 산능선도 들어 다. 멀리 산 에 자리잡은 마을이 보이고 끊임없이 이어진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에 젖어 미끄러운 바위길을 피해 볼 요량으로 다른 길로 들어 섰다가 한마터면 길을 잃을 뻔하기도 하고 깎아 지른 위험한 산길을 내려오다 아이가 신발 한쪽을 잃어 버리는 바람에 고생도 하기도 했던 산행이었다. 하지만 지나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길을 택한 덕분에 꺽정바위도 만나고 함초롬이 비에 젖어 피어 있는 각시둥글레꽃들도 만났으니 그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산길 한쪽에 숨겨져 폭포처럼 흐르던 계곡 또한 등산로를 따라 갔으면 만나지 못할 비경이었다.

베란다 창문으로 여전히 천마산 산봉우리가 우뚝 하게 보인다. 명 예전의 그 산 봉우리건만 전혀 다른 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산의 나무와 꽃과 계곡을 마음에 담아 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