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분교에는 4명의 아이가 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승산이, 쌍둥이인 정기와 정상이 그리고 홍일점인 민희. 이 4명의 아이들은 모두 1학년으로 5학년인 아이들 5명과 함께 생활한다.
3월 입학식을 한 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보건소에서 보건소장님과 선생님 한 분이 분교를 찾으셨다. 1학년 아이들의 혈액형을 검사하기 위해서였다. 4명의 아이들 중 번호가 1번인 정기가 제일 먼저 검사를 받았다. 선생님은 정기의 손톱 밑을 바늘로 찔러서 피 한 방울을 채취했다. 선생님이 바늘로 찌르자 순간 정기 입에서는 “아야”하는 짧은 비명이 나왔다.
그 다음엔 형보다 엄살이 덜한 정상이가 의젓하게 검사를 마쳤다. 그 후 제일 걱정스럽던 승산이의 차례가 왔다. 하지만 승산이는 결국 검사를 받지 못했다. 자기 차례가 되자 자지러지게 울었기 때문이다. 옆에 계시던 다른 선생님들은 아이를 꽉 붙잡고 시도해보자고 했지만 나는 보건소장님에게 다음 기회에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우리 반에서 가장 작은 아이인 승산이는 엄마가 안 계신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예방접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주사를 맞고 나서 그 아픔을 빨리 잊을 수 있는 이유는 엄마의 사랑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들은 그 아픔을 희석시켜 줄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아픔이 오래가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에 승산이의 검사를 강행할 수 없었다.
그렇게 3월을 보내고 있던 중 4월 하순 경 뇌염예방접종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서 예방접종의 필요성을 여러 번에 걸쳐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들었지만 아무래도 1학년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늘이 없는 모형 주사기를 가지고 주사를 맞는 실습을 해봤다.
1. 주사를 맞을 팔을 걷는다.
2. 고개는 주사를 맞는 팔의 반대쪽으로 돌린다.
3. 눈을 감는다(다른 사람이 맞는 것을 쳐다보지 않는다).
이런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여러 번에 걸쳐 주사를 맞는 실습을 했다. 이 모든 것은 작고 여리고 눈물 많은 승산이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이었다.
시간은 흘러 4월의 어느 날 하얀 가운을 입은 2명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뇌염예방접종을 해주기 위해서 학교를 찾았다. 아이들은 하얀 가운을 입은 선생님들을 보고 약간 긴장을 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예방접종은 시작됐다.
정기와 정상이가 주사를 맞고 드디어 승산이 차례가 됐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승산이가 용감하게 주사를 맞은 것이다. 승산이를 위해 만든 교육프로그램이 효과가 있었나보다.
조금은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승산이는 교실에서 해보았던 대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씩씩하게 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맞는 순간 조금 찌푸렸던 얼굴이 “이제 다 되었다”라는 의사선생님의 말과 함께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승산이는 어려운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로부터 20여일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연락도 없이 ‘대전 건강검진협회’라는 곳에서 2명의 선생님이 찾아왔다. 그분들은 1학년 아이들의 심전도검사와 빈혈검사를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본교로부터 연락을 받지 않은 사항이기 때문에 본교에 연락해 자초지종을 물은 뒤 검사를 시작했다. 심전도 검사는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빈혈 검사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를 뽑아야 했다. 아이들의 얇은 팔에서 많은 양의 피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되었지만 우리 4명의 1학년 아이들은 용감하게 그 아픔을 이겨냈다.
나는 5㎖가 넘는 피를 뽑는데도 한번도 울지 않고 아픔을 참아내는 아이들이 대견스러웠다. 그것이 교육의 힘이라고 느낀 나는 교육자로서 또 한번의 희열을 맛보았다.
빈혈검사가 끝나고 나는 그 선생님들에게 부탁을 했다. 빈혈검사를 위해 뽑은 피를 가지고 승산이의 혈액검사까지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난 31일 승산이의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다. 승산이의 혈액형은 O형이란다.
이 과정을 지켜보신 교장선생님의 말씀 하셨다. "위대한 교육의 힘이다"라고 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