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정이 듬뿍 든 상추쌈

난 그들에게서 '정'을 배운다

등록 2005.06.05 23:33수정 2005.06.0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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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할 정도로 순간순간 숨 가쁘게 변해가는 요즘 세상. 하지만 화려하게 발전해가는 우리네 세상사의 겉모습과 달리 실눈을 뜨고 들여다보는 우리네 세상사의 깊은 내면은 지금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해가고 있을까.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희귀한 범죄들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우리네 인정은 오랜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쩍쩍 갈라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일련의 세상살이들을 TV나 각종 매체에서 접할 때마다 나는 내가 사는 이곳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사 중 제일 중요하고 소중한 건 과연 무엇일까. 나는 망설임 없이 '정'이라고 생각한다. 생면부지의 남남들이 약삭빠른 계산 속 한 점 없이 그 중요하고 소중한 '정'이란 것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는 곳이 바로 내가 사는 이 곳이니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나 요즘엔 내가 사는 이곳이 지구 어느 한 귀퉁이에서 떨어져 나온 천국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건 바로 하루 세끼 매번 밥상에 오르는 상추 때문이다.

밭임자만 따로 있을 뿐 상추 주인은 따로 없다

요즘 우리 동네 집집마다 텃밭엔 상추가 한창이다. 하지만 밭임자만 따로 있을 뿐 그 상추의 주인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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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농사라고는 근처에도 안 가보고 텃밭이라곤 손바닥만한 것도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엔 점심상을 차리기 전 상추를 뜯으러 밭으로 향한다. 누구네 밭이든 상관없다. 이 밭 저 밭 둘러보고 적당히 먹기 좋게 자란 상추를 마음껏 뜯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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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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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내가 그렇게 남의 상추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바로 그 내 이웃들의 '정'때문이다. 나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다만 흙냄새와 거름 냄새를 몸살 나게 사랑하는 참으로 어설픈 시골 '아지매'일 뿐이다. 내 이웃들도 그 사실을 다 알고 있기에 그네들은 기꺼이 내게 정을 나누려 한다. 너도나도 우리 집을 지나칠 때면 빠지지 않고 건네는 말들이 있다.


"복희 엄마. 요즘 우리 밭에 상추가 한창이야. 열심히 뜯어다 먹어."

처음엔 그저 인사치례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무심히 듣고 넘겼다. 하지만 그네들은 이미 내 그 속마음까지도 들여다보고 있었음인지 손수 상추를 뜯어서 가지고 왔다.

"아유. 바쁜 사람 이렇게 발품 팔게 만드네. 복희 엄마 정말 이렇게 귀찮게 할 거야. 내일도 또 뜯어다 줘?"

그네들은 사람 좋은 웃음을 상추바구니에 덤으로 얹어 주며 고마움에 고개를 못 드는 나를 참 무안하게 하였다. 결국 그네들은 나를 상추밭으로 불러 들였다. 하여 요즘. 우리 집 밥상엔 상추가 빠지지 않고 밥상 한중간에 떠억하니 자리 잡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상추 뜯으러 간다

오늘도 점심나절에 쪼르르 텃밭으로 달려가서 자줏빛 잎이 오물오물한 상추를 한 바구니 뜯었다.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찬 지하수를 콸콸 틀어 놓고 상추를 한잎 한잎 깨끗이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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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쌈장을 만든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쌈장종지는 바닥을 하얗게 드러내고 있었다. 고추장과 된장을 적당히 섞고 참기름도 몇 방울 떨어뜨려 고소한 쌈장을 다시 한 종지 가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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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그리고 지난번 장날 사가지고 온 풋고추도 몇 개 씻어 상추와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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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혜

역시나 오늘 우리 집 점심상도 봄날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이웃의 '정'으로 가득하다. 손바닥에 자줏빛 상추 한 잎을 올려놓고 그 위에 밥 한 숟갈을 올리고, 이어 고소한 쌈장도 듬뿍 얹었다. 오글거리는 자줏빛 상추를 이리저리 모아 입에 들어가기 좋을 만큼 적당한 쌈을 만든 후 입에다 냉큼 집어넣었다.

봄은 그렇게 내 혀끝에서 녹아나고 있었고 내 이웃의 정은 또 그렇게 내 가슴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상추쌈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나는 어제처럼 또 근심 한 자락이 내 마음에 걸리는 걸 느낀다.

'나는 그네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줘야 하나.'

나른한 오후 시간. 커피를 타서 밭으로 내어가기도 하고, 부침개라도 만들어 그네들을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그네들의 노곤한 오후를 위로해주고 싶어 두 눈을 부릅뜨고 인터넷이나 책에서 애써 찾아낸 우스갯소리 몇 마디를 머릿속에 담고는 그네들을 찾아가 그 어느 비단 방석보다도 더 폭신하고 부드러운 그네들의 밭에 함께 퍼질러 앉아 손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바닥을 두들겨 대며 내 고마운 이웃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늘 부족했다. 그런 것들로 내 이 기꺼운 마음의 정을 대신한다는 것에 매번 갈증을 느꼈다.

내 이웃에게서 나는 '정'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아마도 그네들은 내 이런 애타는 갈증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이웃은 그저 무엇이든 내주는 것에 받는 나보다 더 행복해 했고,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누어 먹는 콩 반 조각에 나보다 더 행복해 했으니까.

하여 나는 요즘 내 이웃들에게서 참으로 귀중한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 어떤 반대급부도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주는 것에서 느끼는 만족 그리고 그 만족에 따른 행복. 그게 바로 '정'이라는 것. 그 '정'이 또한 이 세상을 지탱하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힘이라는 것을 내 이웃들을 통해서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하여 지금 이 순간. 내 일상이 그네들과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소망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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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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