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잣대'에 왜 언론이 생트집?

[다시, 인권이 기준이다③] 2005년 4월, 언론에 비친 국가인권위

등록 2005.06.07 10:05수정 2005.06.0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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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만으론 노동시장 재단 못 한다"

지난 4월 16일자 <세계일보> 사설의 제목이다. 비슷한 취지의 언명은 "'인권'만으로 풀기 어려운 노사 문제"라는 같은 날 <국민일보> 사설 제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딴 나라 사람 같은 인권위의 비정규직 해법"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냈다.

물론 특정 언론이 특정한 사회적 의제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내놓든 그 자체는 왈가왈부할 일이 못 된다. 어떠한 견해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 '인권' 중의 하나인 '표현의 자유'의 핵심일 터이다.

a 인권위의 비정규직 법안 관련 의견표명을 다룬 언론

인권위의 비정규직 법안 관련 의견표명을 다룬 언론 ⓒ 사진 김윤섭


그렇다면 그 연장선에서 이런 질문을 한번 던질 만하다. 가령 왜곡된 언론 시장의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들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들에게 누군가가 "인권이라는 잣대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식으로 맞받아친다면 이들은 과연 어떻게 대꾸할까!

2005년 4월은 언론을 통해 본 국가인권위에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한 달이었다. 국가인권위가 지적한 해당 사안의 주무 장관에게서조차 "무식하다"는 원색적인 망발까지 들었을 정도이니, 언론의 뭇매는 차라리 다음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뭇매'가 과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다른 견해'의 표명이었을까.

<세계일보> 사설은 "인권만으론 노동시장 재단 못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몇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그 하나가 "노동 문제와 직접 연관이 없는 인권위가 개입해 혼선을 야기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도 의문이다"라는 대목이다. 아마도 국가인권위의 의견에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근거를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전제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령 비정규직 관련 법안에 대한 의견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심각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 문제 역시 '교육과 직접 연관이 없는 국가인권위'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 반발의 심정적 근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국가인권위와 직접 연관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예컨대 비정규직 법안 문제로 국가인권위가 한창 '동네북'이 되어 있을 때 뜬금없이 제기된 '북한 인권' 문제. <조선일보> 4월 23일자 사설 '국가인권위, 북한 인권만은 보이지 않는다'는 무슨 근거로 '대북 문제와 직접 연관이 없는 국가인권위'가 나서야 할 사안이라는 것일까.

게다가 이 사설의 빌미가 된 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의 4월 21일 국회 발언은 이 사설에서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듯이 "국가인권위가 북한 인권 문제를 국내 인권과 같이 다룰 수 있는지 여부부터 정리가 안 돼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이라크 파병 논의 때 "정부와 국회가 이라크 전쟁 희생자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의견은 '국내 인권' 문제냐고 반문하고 싶겠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조 위원장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이 아닌 북한 정부에 대해서도 국가인권위가 판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인지 정리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과 관련한 국가인권위의 의견 표명은 이라크가 아닌 대한민국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북한의 인권 상황은 물론 중요한 '인권 문제'이지만, 그런 논리를 끌어대고 싶다면 우선 우리 정부나 국회가 북한의 인권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법안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증거부터 제시해야 한다.

인권 문제는 '인권을 잣대로'

국가인권위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에 대한 의견에 온갖 험구를 늘어놓은 이들은, 국가인권위가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입법·행정·사법 활동을 통해 국민의 삶에 개입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것을 '인권의 문제'로 바라보고 '인권을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국가인권위의 가장 핵심적인 존립 근거다. 그것은 국가인권위원회법만 들여다봐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인권의 잣대만으로' 판단한 것이 부적절하다고 타박한다면, 아예 국가인권위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대체 국가인권위에 '인권'이 아닌 어떤 다른 잣대를 적용하라는 뜻일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 문제와는 직접 연관이 없는'이라는 표현의 이면에는, '인권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애당초 국가의 작용이 미치는 '모든' 영역이 다른 어떤 잣대도 아닌 '인권의 잣대로' 판단될 필요가 있다는 데에 국가인권위의 존재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특정 사안이 국가인권위가 의견을 제시하거나 시정을 권고하는 것이 적절한 '인권 관련 문제'인지 아닌지는 당연히 '인권을 잣대로' 판단을 내리는 국가인권위가 할 일이며, '인권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거기에 함부로 개입해서 국가인권위가 개입할 사안이니 아니니 트집 잡는 것 자체가 '월권'이다.

물론 모든 언론에 '인권'을 판단의 최우선적 잣대로 삼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각자의 가치관에 비추어 얼마든지 다른 잣대로 현실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고 그것을 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인권위가 '인권의 잣대로' 펼치는 활동에 관한 의제 설정만큼은 '인권'이라는 잣대를 작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설정된 의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든 그것은 언론의 자유겠지만 말이다.

a 2001년 11월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

2001년 11월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 ⓒ 사진 김윤섭


일부 언론, 선정적 의제 우선

가령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 문제로 온통 도배되다시피 한 지난 4월 7일 무렵의 언론 지면과 그 이면을 보자. 모처럼 '건수'를 만난 언론은 '논쟁 부추기기'에 혈안이 되어 2주 가까이 독자참여란까지 뜨겁게 달구며 이 사안을 다루었다.

이 사안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고 그 중요도는 해당 언론사가 판단할 문제이다! 사회적 관심사에 활발한 토론과 적극적인 논쟁을 유도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지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도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 전날인 4월 6일에 발생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국가인권위 관련 사건이 언론 지면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비중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사형제 폐지 의견이다. 일부 언론에서 기사화되기는 했지만 이후 지면에서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만큼의 파괴력을 가진 의제로 등장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짐작하자면, 여전히 사회적으로 존속과 폐지의 양론이 팽팽한 '사형제'를 둘러싼 논란이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 문제보다 '인권 의제'로서 중요도가 떨어져서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사형제'가 상대적으로 진부하고 식상한 의제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침묵하는 바람에 자칫하면 영영 묻혀 버려서 국가인권위의 공식 기록에나 남아 있을 뻔했던 '주민등록번호 제도 이대로 좋은가?'라는 토론회가 열렸다는 사실이다.

그 침묵이 얼마나 견고했던지 만일 <민중의 소리>라는 온라인 언론이 이 사실을 상세히 보도하지 않았더라면, 지난 한 달 동안의 국가인권위 관련 기사를 샅샅이 훑은 필자조차 까맣게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민중의 소리>가 보도한 기사 내용처럼 "민간 차원에서 주민등록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되어 왔지만 정부 차원의 토론회가 진행된 것은 이례적"이라면, '진부하고 식상한 의제'라는 설명만으로는 이 침묵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경우에 가장 잘 들어맞은 설명은 아마도 '상대적으로 선정적이지 못한 의제'라는 것일 게다.

이 점은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민중의 소리>가 보도한 기사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토론회'나 '공청회' 단계에서 주요 언론이 이를 의제화하는 것은 우리나라 언론 현실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그러고선 그것이 구체적인 정책이나 법안으로 가시화한 뒤에야 마치 일부 전문가들끼리 '밀실'에서 입안하기라도 한 듯 요란하게 '뒷북'을 치며 '졸속'을 질타하는 선정적인 여론몰이를 하는 데 골몰한다.

그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령 지난 가을 '성매매 특별법' 시행을 전후해 발생한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논란을 벌이려면 법안의 발의 과정이나 또는 적어도 국회 통과를 전후한 시점이어야 했을 것이다.

법안 제출 과정에서 입법 예고까지 다 하고 국회에서 논의하는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쳐 의결되고 공포된 지 여섯 달이나 되는 법을 두고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갑자기 시행하면 어쩌란 말이냐"는 식의 터무니없는 태도가 횡행한 것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었을 이 사안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의제화해 내지 못한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

일기장 보도, '태산명동서일필'

이 점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어쩌면 이미 의견 표명이 이뤄져 주무부처인 교육부의 판단만 남은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 문제보다, 형법 개정을 위한 논의가 당연히 필요한 '사형제 폐지' 의견이, 또 그보다 시민사회에서 오래 전부터 공론화되어 왔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제 막 국가기구인 국가인권위가 검토를 시작한 '주민등록제 개선'에 대한 여론 수렴 작업이, 의제 설정을 통한 여론 형성이라는 언론의 본래 역할에 비추어 훨씬 더 강조되어야 할 의제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 까닭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이 얄팍한 상업주의에 의해 선정적으로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반드시 지적할 점은, 서로 대립하는 의견 사이에 사회적 갈등이 깊은 사안일수록 언론이 '정론'을 통해 시비를 가리기보다 기계적 중립성에 매몰되어 '중계방송'식 보도로 일관하며 여론을 형성하기보다 논쟁 자체를 즐기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논쟁이 소모적으로 가열될수록 장사가 더 잘 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실 관계에 대한 충분한 검토도 없는 감정적인 반응이나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된 주장까지 버젓이 '동등한 비중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하나의 의견'으로 둔갑하며 논쟁이 점점 더 소모적으로 빠져 들어간다. 언론이 장사를 하기 위해 소모적 논쟁을 유도하고 이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그것을 고스란히 시민사회에 떠넘기는 꼴이다.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를 둘러싼 논란은 그 전형적인 사례다. 교육부가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수용하는 것으로 싱겁게 결론이 난 시점에서 되돌아보자면 말 그대로 태산명동에 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아닌가.

그에 비하면 차라리 '인권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는 사안이라면서도 한목소리로 사용자의 처지를 두둔하고 나선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다수 언론의 보도 태도가 그나마 상대적으로 언론 본연의 자세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의 기능에 대한 무지와 오해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안무치가 유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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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5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5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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