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제철인 노란꽃창포(지난해 모습)박도
제 철에도 피지 않는 꽃
집을 물려받아 살게 되면 전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곧 알게 되고, 그에 대한 미움과 고마움을 두고 두고 새기게 마련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안흥 집의 전주인은 민속학을 전공한 이영식 선생과 그림을 그리는 김현일 선생 부부였다.
워낙 오래 되고 낡은 집이라 우리가 물려받은 뒤 아내가 여기저기 손을 많이 보았지만 구석 구석에 알뜰한 주부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곳이 많았다. 특히 뜰에 화초를 여러 가지 심어놓아서 봄부터 가을까지 눈을 즐겁게 했다.
내가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 해 여름(2003년), 한 차례 와 보았더니 집 어귀의 노란꽃창포와 붓꽃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일대 장관을 이뤘다. 그밖에도 옥잠화, 금낭화, 야생 원추리를 집 안팎에 잔뜩 심어놓아서 여름 내내 푸근함에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 즈음 한창 무성하게 돋아나야 할 노란꽃창포와 붓꽃들이 올해는 오뉴월에 서리를 맞은 듯 비실비실 메마른 채 여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제철이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라고 무심코 지냈는데, 다른 곳에 옮겨다 심은 노란꽃창포는 활짝 피었는데도 집 어귀의 붓꽃과 노란꽃창포는 아직 땅바닥을 기고 있고, 그 언저리 풀들은 늦가을의 된서리를 맞은 양 누렇게 자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