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춘씨인권위 김윤섭
"보안관찰자 정기신고서에는 3개월간의 주요 활동사항을 기재하는 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보안관찰자를 만난 사실에 대해서도, 여행이나 관할 경찰서장이 지시한 사항에 대해서도 '없음'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스운 핑퐁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까. 같은 보안관찰대상자이면서 지금까지 출소신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소신고를 하지 않아 강제연행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실효성 없는 이 일을 왜 계속해 반복해야 하는지 저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안관찰법으로 인해 받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은 만만치 않다. 죄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공범자들이 다 출소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혈기왕성하여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갱신처분이 내려진 그는 한때 모든 악조건을 받아들이며 살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다. 출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임신한 것이 그 첫째 이유였고, 가정을 꾸려 나갈 만한 직장을 구한 것이 둘째 이유였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감옥에서 3년을 살고 나온 만큼 사회에 빨리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게 순서임에도 상황은 영 아니었습니다. 바쁜 시간 쪼개 3개월마다 써야 하는 정기신고는 피곤했고, 갱신기간 때면 잊고 지낸 공소장의 사건들이 무슨 유령처럼 튀어나와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얘기가 계속되자 서른 중반의 그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얼마 전 해외출장을 가기 위해서 신청서를 냈으나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새로 바뀐 경관이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직장 상사가 전화를 받자 "회사는 잘 다니고 있느냐?" "집안에는 별일 없어 보이느냐?"는 식의 뒷조사가 있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세기간이 끝나 가는 요즘 그는 아내에게마저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생겼다.
"출퇴근길이 멀어 이사를 해야 하는데 망설여집니다. 새로운 주소지로 이사하면 처음부터 다시 조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천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먼저 밀려옵니다."
북한에 친형 생존이 보안관찰의 사유?
심재춘씨의 말 못할 고민은 그것만이 아니다. 가족과 여행을 가는 도중 검문이 있을 때면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으로 인해 부모님과 아내가 실의에 빠질까 봐서다.
자기검열 좀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심재춘씨와 헤어진 다음 날 찾아간 곳은 미아삼거리에 있는 비파다방. 1995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되어 1998년 3월에 출소한 박창희(73)씨는 국민학교란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로잡은 인물이다.
당시 외국어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일제잔재 청산문제와 독도사랑운동, 강제징용 노무자문제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중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친형 문제로 국가보안법과 인연을 맺어야 했다. 그로 인해 피보안관찰 대상자가 된 그는 현재 보안관찰 갱신처분에 불복, 서울고법에 처분취소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나는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반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재범에 대한 우려성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뭔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을 찾아내어 제시하고 심판한다면 그 어떤 법도 달게 받아들이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출소 후 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서 번역 작업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1998년 3월에 출소하자 주거지 불안정과 가족의 생계유지 능력이 없다는 게 갱신사유가 되었다. 그랬던 갱신사유는 2년이 지날 때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시소게임을 했다. 일본에 너무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고, 최근 들어서는 분단 비극의 외통수라고 할 수 있는, 북한에 친형이 생존해 있다는 것이 검찰 측에서 내세운 사유다.
"출소해서는 처량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아내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처럼 이야기하더군요. 물론 그때라고 해서 생활비가 적은 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150만원 정도는 벌었으니까요. 남편이 실직하면 부인이 대신 생활비를 벌 수 있지 않습니까. 형님 문제도 그래요. 북에 있는 형님 문제는 이미 적십자사를 통해 상봉 신청서를 낸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적십자사가 처리해야 할 문제를 갱신사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칠순을 넘긴 학자답게 박창희씨는 논리적이다. 집에서 들고 나온 쇼핑백을 열자 재판에 제출할 서류와 그동안 번역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동의보감>을 일어로 번역한 <허준(상·하)> <러일전쟁과 세계사> <지문날인 거부-내 나라를 찾아서>, 일본인이 쓴 <조선의 어머니> 같은 그의 번역서에는 민족과 애국이 공존한다.
"이 나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학문을 해온 사람으로 심경을 고백하자면 너무 힘이 듭니다. 전화가 되지 않을 땐 도청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언제 또 구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검열하느라 병이 날 지경입니다."
그날 자리를 옮겨 만난 황인욱씨도 같은 심정이라고 했다. 종각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도 세상과 사람은 변화를 거듭하는데 유독 법의 잣대만 콘크리트 벽처럼 굳어 있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끊임없는 사찰과 감시
"몸에 새겨진 문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혼자 있을 때나 생활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지만 상대방 앞에 섰을 땐 달라지잖아요. 검사들의 갱신 심사 질문도 그래요. '한 달 수입은 얼마냐?' '지금도 공범들을 만나고 있느냐?'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방향의 통일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사회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런 것들을 갱신할 때마다 지겹도록 묻거든요."
그러면서 그는 그와 같은 질문들이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초등학교 수준의 것들이냐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버린다. 담당 경관이 자주 바뀌는 것도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경관이 바뀌면 만나야 하고, 만나서는 사생활까지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경관은 이미 사람을 만나기 전 사건기록부터 점검하는 터라 모든 사고가 그곳에 박혀 있다.
"나는 변화하고 싶은데 경관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 마찰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은 세 들어 살고 있는 주인댁을 찾아와 이것저것 묻고는 당사자인 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사찰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담당자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일요일 아침, 현관문 벨소리가 울렸다. 가장 먼저 뛰어나간 사람이 하필이면 여섯 살난 딸아이였다. 일산경찰서에서 나왔다는 경관의 한마디에 아이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그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아이한테는 경찰서에 근무하는 아빠 친구라며 안심을 시켰지만 담당 경관이 바뀔 때마다 이와 같은 일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자신이 겪어야 할 고초를 세 아이가 겪는 것 같아서다.
"출소 이후 6년 동안 여덟 명의 경관이 바뀌었는데 이젠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협조적이나 비협조적이나 갱신이 되는 건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요. 아마 감옥에서 이렇듯 열심히 살았다면 엄청난 감형을 받았을 겁니다. 아이들도 놀랄 필요 없고요."
"암보다 더 무서운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