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계'의 절대강자!

[단속의추억]그 애는 '단속'에 절대 걸리지 않았습니다

등록 2005.06.10 01:32수정 2005.06.10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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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엔 햇살이 화창한 날이건, 축축하게 비가 내리던 날이건… 오전 10시만 넘으면 배가 고팠다. 왜일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건, 아침을 못 먹고 등교를 했던 간에 이상하게 그 시간만 되면 배가 고팠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장 달라진 것 중의 하나는 뭐든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어졌다-중학생의 폭 좁은 세계관에 비하여-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보다 멀어진 학교 길에는 중학생의 얇은 주머니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학교 가는 길에 즐비하게 있던 문구 좌판조차 우리의 등교시간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학교 가는 길의 그런 즐거움도 잠시 우리는 교문 앞에 다다르면 잔뜩 움츠러들었다. 왜? 학생주임선생님이 교문 앞에 서서 '단속'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주임선생님은 표정 하나로 모든 상황을 제압하는 최고의 '단속맨'이었다. 일단 지각생들은 절대 구제 받을 수 없었으며 배지나 명찰, 머리카락 길이, 옷매무새 등이 교칙에 어긋나면 '단속'에 걸리는 것이다. 우리는 늘 완벽해야 했으며 단속 당할 것이 없어도 교문 앞을 지날 때면 언제나 주눅이 들었다. 특히 신입생인 우리들에게는….

하지만 우리 반엔 단속에 절대로 걸리지 않는 천하무적인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학교의 담이란 담은 언제나 가뿐히 넘을 수 있는 체력과 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에 단속에 있어 절대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 아이와 나는 대조적이었다. 그 아이는 항상 간발의 차이로 지각을 면했고 나는 간발의 차이로 단속에 걸려 매번 운동장 돌멩이 줍기와 화단의 잡초 제거를 해야 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운명을 그렇게 결정지었던 것일까. 그 애와 단짝인 나는 이내 그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숨 막히는 등굣길의 비밀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우리 학교 교문은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서 5분, 학교 동쪽에선 10분 이상 열심히 걸어야 서쪽 교문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동쪽엔 쓰레기소각장이 있었다. 동쪽에 사는 그 아이는 쓰레기소각장 담을 살짝 넘기만 하면 10분을 절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아이와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고 해도 그 아이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지각 단속 이외 다른 단속에도 걸리지 않았다. 한번은 그 애가 보충수업 시간에 도망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은 출석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명찰을 가지고 오지 않은 날도 무사히 지나갔다. 사실 그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좀 억울했다. 나의 경우 매번 단속에 걸려 운동장에서 돌을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생주임선생님에게 단속을 당한 나는 학생주임선생님과 닮은 체육선생님만 봐도 정신이 아찔해졌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있은 뒤 그 아이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a 학생들에게는 언제나 간식 목록 1호로 남을 떡볶이.

학생들에게는 언제나 간식 목록 1호로 남을 떡볶이. ⓒ 이민정

당시 우리학교 최고의 히트 상품은 교문에서 불과 3분 거리에 있는 떡볶이 포장마차의 떡봉지였다. 금방 한 떡볶이에 삶은 달걀 하나를 넣어 포장한 다음 비닐봉지에 구멍을 뚫어 쭈욱~ 빨아 먹는 그 맛.

그 떡볶이의 진정한 맛은 오전 10시에야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는 2교시 중 주문리스트가 완성되면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뛰쳐나간다. 그리고 우리에게 맛있는 떡볶이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전교생에겐 비극이 다가왔다. 진입로 확보를 위해서라며 교문이 변경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입로가 3배 이상 길어져 쉬는 시간 10분 안에 떡볶이를 사오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그 아이는 진입로가 3배 이상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떡볶이를 사왔다. 진입로가 길어지는 시련이 있었음에도 우리가 떡볶이를 계속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그 작은 행복은 이내 마감돼야 했다. 학생들의 쉬는 시간 이탈이 계속되자 학교와 학생, 떡볶이 장사 아줌마가 협의를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떡볶이 만찬은 점점 사라졌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학교 근처를 지나다 그 떡볶이 집을 발견했다. 주인은 여전히 같았지만 메뉴도 다양해졌고 더 넓어졌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떡볶이 집에 들어가 떡볶이를 시켰지만 옛날의 그 맛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 때 그 떡볶이에 그토록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그 옛날 '떡봉지'에 얽힌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친구들아, 너희도 그 때 그 떡볶이를 기억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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