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88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6.10 19:52수정 2005.06.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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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고정하소서.”

권기범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박규수가 흠칫 권기범을 노려봤다.


“감영 안의 모든 사령이 달려온다 하여도 밖에 있는 제 일행 둘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행이 저들뿐만이 아닙니다.”

빠르게 말을 맺으며 들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한과가 단정하게 쌓인 소쿠리 위 채반을 들어내자 아랫녘에 굵은 대나무 통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것은 발화통이라 하옵는데 비격진천뢰 두어 개의 위력을 내옵니다.”

박규수의 안색이 굳어졌다. 권기범이 대나무 통 틈에서 뭉툭한 쇠뭉치를 하나 들어냈다.

“이건 오혈포라 하옵는데 다섯 발의 총환을 재어 연이어 발포할 수 있는 총포이옵니다. 물론 총환을 다시 재는 데는 재채기 한 번 할 짬이면….”


“나으리 불러 계시옵니까?”

말을 마치지 않아 밖에서 병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잠시 적막이 흘렀다.

“들으니 밖에 비가 내리는 겐가? 밖에 서 있는 손님을 객사로 모시라.”

박규수가 말을 돌렸다.

“저흰 괜찮습니다. 마음 쓰지 마옵소서.”

밖에서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권기범의 호위들이었다.

“정 그러면 우장이라도 좀 챙겨주든지.”

“예,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박규수의 말에 병방이 대답하고 물러나자 권기범이 박규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곡해하지 마라. 네 협박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슨 괴이한 구설을 늘어놓을지 궁금해서니라.”

“저 또한 감영을 업수이 여겨 이리 요사를 떤 것은 아니옵니다.”

“그래, 예까지 와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게냐?”

“나라를 바꾸고 싶습니다.”

권기범이 거침 없이 말했다. 말하는 사람이야 작정을 한 터라 대담하고 침착하게 짧은 말을 내뱉었지만 듣는 사람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라를 바꾸겠다 함은…? 개혁을 이름인가 반역을 이름인가?”

이미 감을 잡았겠으나 한 번 더 확인의 질문을 던졌다.

“혁명입니다.”

“끄응….”

박규수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져 감각이 없어 보였다.

‘어찌 이런 말을, 감영의 동헌에서, 관찰사의 직분에 있는 자에게… 이 자가 몇 안 되는 수하를 믿고 만용을 부리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걸 체념한 아둔아란 말인가?’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빗방울이 굵어졌는지 문 밖에서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신하로서 상을 치는 것이 가하다 여기는가?”

박규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신하이고 누가 상인지요? 누가 만들어 준 상이고 누가 내린 신하인지요? 이 땅의 권력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요?”

권기범의 말문이 터졌다.

“이 땅의 주인은 임금 일인입니까? 이름 없는 천만의 백성입니까?”

“이 땅의 주인은 백성이지. 허나 임금은 그 백성의 교화를 위해 하늘이 내신 것이니 어찌 임금과 백성을 따로이 논하겠느냐.”

“그것이 진정 대감의 생각이십니까. 대감께오서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

“대감의 애민하는 마음은 익히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감께서 관찰사로 계시는 여기 평안도에서 만큼은 작년 병인박해의 기간 동안 단 한사람의 천주교인도 죽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성이 교화의 혜택을 입지 못하여 배정추사(背正趨邪)하는 것인데, 진실로 선으로써 능히 인도하면 모두 우리의 양민인 것을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

박규수의 말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좋으신 생각입니다. 하오나 평안도 외 다른 도의 교인들은 양민(良民)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수천의 목숨이 죽어간 것이오니까?”

“…….”

“그뿐입니까. 대감께오서 지난 임술년(1862) 진주민란의 안핵사로서 민란수습 처리안을 복명하며 삼정지폐(三政之弊)를 논하고 조정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바로잡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단 한 가지라도 성취한 것이 있었사옵니까?”

“그것이 어찌 나의 본의이겠는가.”

“바로 그것이옵니다. 본의가 아니라 하여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방치할 것이며 내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 하여 수수방관하실 작정이시옵니까? 평소 대감의 만국평등주의와 오랑캐와 중국이 결국 한 가지라는 화이일야(華夷一也)적 세계관에 사사받은 바 큽니다. 오늘날 제 사상의 모태는 대감의 몫이 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여 오늘 대감을 찾아 뵈온 것이옵니다.”

“자네에게 그런 바람을 불어넣었으니 내가 책임을 지라 이 말인가?”

“이를테면 그런 말씀이지요.”

권기범이 빙긋 웃었다. 박규수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처음의 당황한 마음은 많이 가신 듯 했다.

“낙학파의 심성론에 기초하여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하는 물성(物性)의 긍정은, 짐승조차도 사람 못지않은 도덕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하층민 역시 지배층 못지않은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논리로서 화(華)와 이(夷) 또한 한 가지라는 생각과 맥을 같이 하지 않습니까. 대감께오선 그 적통을 이으신 분이니 제 생각에 공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홍대용(洪大容) 선생께서 땅이 둥글며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연구하시어 밝혀 낸 이래, 지구가 둥근 이상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주장을 편 것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하오나 군주권이 감소되고 민권이 신장되어야 백성과 국가는 안태(安泰)하게 되며 종사(宗社)와 군위(君位)도 영구히 이어지며, 반대로 군주의 전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백성을 몽매하게 만들면 백성과 나라 모두 쇠약하게 된다는 논리를 펴신 분은 대감 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확대하자면 화(華)와 이(夷)의 구분이 없듯 양반과 상민의 구분도 없다는 뜻이 아닌지요?

군주권의 제한과 아울러 민권의 신장을 위해서는 백성으로 하여금 응분의 자유를 누리게 하여 원기를 키워야 하고, 미개하고 무식한 백성은 어리석고 게을러 빠져 압제의 폭정에 굴복하여 안주하므로 개명되고 사리를 아는 백성으로 계몽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다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지금의, 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백성을 깨우치고자 합니다. 아니 깨어나고 있는 백성들과 함께 일어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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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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