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한국전쟁의 비극을 맞은 김낙중씨는 정신의 흐트러짐을 다잡고자 왼손 새끼손가락을 절단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딸이 유별나다고 한 아버지 김낙중의 삶은 어떠했을까.
'신념대로 살기 위해, 출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위해,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비장한 결심을 한 김낙중. 그는 1954년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머리를 빡빡 깎고 하얀 한복 차림으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눈물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며 "다시는 이 땅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살길은 평화통일뿐"이라고 외치며 단독 시위를 벌인 전력의 소유자다.
강제로 정신병원에까지 보내졌던 그는 두 통의 '통일방안'을 만들어, 한 통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서로 제출하고, 나머지 한 통을 들고 비가 쏟아지던 1955년 6월 25일 에어매트에 몸을 의탁하여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평화통일을 위해 월북하는 사람을 환영한다'던 북에서는 '미제 간첩'으로 몰렸고, 자신의 통일방안에 대한 답을 듣고 병든 몸을 추스를 겸해서 1년여 그곳에 머물다 휴전선을 넘어 귀환했지만, 그에 대한 남한에서의 대접 역시 '간첩'이었다.
재판 결과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이렇게 그는 남과 북 모두에게서 간첩으로 낙인 찍히면서 본격적인 '간첩 인생'이 시작되었고, 1962년·1973년·1992년에도 간첩혐의로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면서, 모두 18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정말 간첩일까?
"간첩은 국가기밀을 빼서 적국에 주는 사람인데, 난 북한이 적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기밀 같은 것을 빼내서 넘겨준 적이 없으니, 내가 무슨 간첩이야? 단지 죄가 있다면 조국과 민족을 너무 뜨겁게 사랑한 죄지."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국가의 물음이 자신의 신념에 반하지 않기에 전향서와 준법서약서까지 제출했던 그는 지금 '형집행정지' 상태다. 그래서 3개월에 한 번씩 경찰서에 보고를 한다. 정치인들이나 재벌들은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잘도 사면복권의 수혜자가 되는데,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그는 그런 행운도 비껴가는 지지리도 복 없는 사람이다.
어머니 이야기를 넣은 이유
김낙중씨 본인이야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그 어떤 고통도 '업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가족들은 도대체 뭔가. '간첩'인 남편과 아버지를 잘못 둔 죄 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심리적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간첩의 딸이라는 말과 시선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어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물론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만이지만…."
김선주씨는, 그러나 아버지가 "북한에 대해 과도하게 열려있"어서 겪어야 했던 가족들의 고충은 '의리' 때문에 남편의 곁을 떠나지 못한 어머니가 있기에 견딜 만했다고 했다.
"제가 이 책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굳이 넣은 것은 어머니가 지켜낸 것이 단순히 '한 가정'이 아니라 '민족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불씨'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