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21) 학창시절 이야기

등록 2005.06.15 02:40수정 2005.06.1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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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


"도니? 나 용호야."
"용호?!, 어디냐?"

"나 지금 서울에서 전화하는 거야."
"서울? 언제 귀국했어?"

"그저께."
"미리 연락 좀 하지 그랬어."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기별 받고 급히 오너라고. 미국에 급한 일로 조용히 그냥 돌아가려다가 네 목소리라도 듣고자…."
"내가 지금 당장 그리로 갈께."

"강원도라서 멀잖니?"
"아니야. 그리 머잖아. 서너 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오늘 저녁에는 가족들과 약속돼 있기에 그럼 내일 보자."


a 졸업 후 40년만에 만난 고교 동창(왼쪽부터 구본우, 이용호 목사, 필자)

졸업 후 40년만에 만난 고교 동창(왼쪽부터 구본우, 이용호 목사, 필자) ⓒ 박도

이튿날 아침, 종로5가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앞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0년만에, 그와 헤어진 지 꼭 30년만에 다시 만났다.

얼굴에 주름만 조금 늘었을 뿐 고교 때 모습 그대로였다. 법학과를 다니던 그가 대학 졸업 뒤에는 회사를 다니더니, 그새 목사님이 되었다. 우리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얼싸 안았다.


1963년 고2 때 그와 나는 한 반이었다. 그때 나는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골뜨기였다. 낯선 서울바닥에서 신문배달에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4년만에 간신히 졸업했다.

그를 만나 이런 저런 학창시절 친구들 얘기하다가 그때 같은 반에서 함께 신문배달을 했던 두 친구에게 불쑥 전화를 했더니 노진덕 전 해군제독은 다른 일로 못 오고 구본우 목사만 달려왔다.

"술과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다"

"술과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다"고 하더니, 우리 세 사람은 40년 전으로 돌아가서 동창들 이야기, 모교 선생님들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가 기억하고 싶지 않는 추억을 끄집어냈다. 바로 우리들의 담임선생님 얘기였다. 어느 날 종례시간 등록금 미납자로 불려나간 사람이 공교롭게도 신문배달 했던 세 사람이었다.

"야, 돈 없으면 학교 관둬!"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 세 사람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가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신문에 보면 어떤 선생님은 가난한 제자를 도와준다는데 선생님은 제자를 도와주기는커녕 가슴에 상처를 주십니까?"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어느 수업시간, 우리 학우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한 선생님으로부터 친구와 서로 뺨을 치게 하는 벌을 받았다. 그는 선생님의 강압에 못 이겨 친구끼리 서로 치고받았는데, 그게 치는 거냐고 선생님으로부터 시범으로 뺨을 맞은 뒤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갔다. 그 길로 교장실로 뛰어 들어가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하여 끝내 관철시킨 고집불통의 문제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시골뜨기에게는 온정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흑석동 그의 집에 숱하게 드나들면서 주린 배를 채웠다. 그 뒤 나는 모교 교사로 부임하여 고2 때 담임선생님과 함께 근무했다. 그때 담임선생님을 찾아 부임 인사를 드리자 아주 어색한 표정으로 "너 내가 훈장 되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셨다.

지난 겨울 고교시절 도와주던 친구들이 그리워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올렸더니, 내가 찾았던 고1 때 짝 양철웅군은 이 세상을 떠났고, 뜻밖에도 뉴저지에 사는 고2 때 단짝 이용호 목사를 찾았다.

세 사람이 점심을 함께 나누면서 그새 밀린 안부와 살아온 얘기를 정답게 나눈 뒤, 그는 출국하고자 대학로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떠나고 나와 구 목사는 종로5가에서 서로 다른 방향의 지하철 탔다.

안흥행 막차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여러 생각에 잠겼다. 어려웠던 시절에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임을 새삼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과연 교단에서 어떤 선생이었을까 곰곰이 반성해 보았다. 나의 언행으로 상처받은 제자가 없지 않았는지? 행여 그런 제자가 있다면 뒤늦게나마 엎드려 빌고 싶다.

일찍이 공자가 말씀하셨다.

"후배들이란 두려운 존재이니, 장래의 그들이 오늘의 우리만 못할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나만은 예외라고 후배를, 제자를, 자식을 속이거나 함부로 대한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그런 사람일수록 더 고개 빳빳하게 쳐들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이 있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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