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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모스 ⓒ 안준철
수업시간에 영어 단어를 설명하다가 내 스스로 뭉클한 감동에 빠질 때가 있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인 셈이다. 낭만적인 시구 하나로 학생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던 호시절도 아닌데 자기 말에 스스로 도취되는 이런 촌스러운 선생님을 향해 눈을 반짝여줄 순진하고 만만한 제자들이 얼마나 될까?
훌륭한 시편과 견줄만한 팝송으로 수업을 하면서도 한 줄의 가사가 주는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내가 치러야하는 인내와 극한의 감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내 가슴에서는 여전히 뭉클뭉클 솟구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어쩌랴? 어느 날 영어시간, 나는 '코스모스(cosmos)'라는 단어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여러분, 저는 꽃 한 송이에서도 우주를 봅니다. 선생님이 시인이어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시적 상상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학적 상식에 가깝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태양의 도움 없이 한 송이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태양은 저 혼자서 일을 합니까? 태양계의 여러 천체는 만유인력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정연한 역학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천체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겨서 균형이 깨어지면 태양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태양이 지구에 조금만 가까워져도 꽃은 타죽고 말겠지요. 이렇듯이 꽃 한 송이를 피우는데 온 우주가 협력하고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코스모스가 하나의 꽃 이름이면서 우주, 혹은 질서라는 뜻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들어보니 그럴 듯한지 귀를 쫑긋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그 중 한 아이에게 다가갔다. 숙제를 네 번씩이나 해오지 않은 아이다.
"네가 어떻게 태어났지? 누가 널 만들었냐고?"
"예? 그건 말하기가 좀 뭐한데요."
"오버하긴? 네 엄마 아빠가 널 만드셨잖아. 그럼 네 엄마 아빤 누가 만드셨지?"
"그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누가 만드셨지? 물론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만드셨겠지. 그런 식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인간이 나오겠지. 그 사람은 누가 만들었을까? 두 가지 주장이 있어. 신이 만들었다. 아니다.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 난 전자 쪽인데 만약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넌 신의 아들이야.
그리고 말이야, 그 최초의 조상부터 너에게 이르기까지 천재지변이라도 생겨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잃었다면 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너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전 우주, 전 역사가 동원되었다는 얘기야. 네가 그런 사람이야. 그런데 4관왕이 뭐야 4관왕이? 앞으로 잘 할 거야 어쩔 거야?"
"잘 하겠습니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녀석의 입에서 그런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다니? 제 자신도 이상한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런데 4관왕이라니? 그것은 숙제를 네 번 해오지 않은 아이에게 붙여준 별칭이다. 처음에는 "별이 네 개네"하는 식으로 말했다가 아차 싶어 말을 바꾼 것이다. 숙제를 해오지 않는 아이들을 향해 던지곤 했던 부정적인 언어들도 이런 식으로 변했다.
"오늘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들 고마워요. 수행평가 점수를 모두 만점을 줄 수는 없는데 선생님 곤란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알아서 점수를 깎아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자,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해준 친구들에게 모두 박수."
꾸중을 들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박수를 받은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어떤 말을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아이들의 눈에서 동요의 빛이 일기도 한다. 아무리 무감각한 아이라도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의 질감을 가릴 줄은 안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사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즐거움이 있다. 그 즐거움의 시간은 물론 반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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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등나무터널 ⓒ 안준철
어느 핸가 나는 점심시간에 학교 등나무 아래를 걷고 있었다. 내 옆에는 두 아이가 함께 있었다. 두 우주와 함께 걷고 있는 나는 마냥 행복했다. 내가 그들의 삶에 작은 영향을 끼칠 수 도 있는 교사라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초임교사시절, 나는 내게로 온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교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 대한 사랑이 아니라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한 나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6월의 등나무 숲은 거대한 터널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등나무 터널이 그늘을 만들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아이들과 함께 푸르고 눈부신 하늘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오랫동안 등나무 터널 안에만 있다보면 그 위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등나무 숲에는 작은 틈새들이 있었다. 빛의 알갱이들이 쏟아져 내리는 그 틈새들을 들여다보다 말고 나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나는 네게 틈새가 되고 싶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먼 길 가다가
해찰하여 눈 마주친 소년처럼
간이역에 핀 코스모스처럼
틈새에서 피었다 지는 풍경이 되고 싶다
네게 맑은 물 내어주는 틈새가 되고 싶다
그렇지, 맑은 물은 언제나 틈새에서 흘러나오지
깊은 틈새에서 흘러나오지
그 틈새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되고 싶다
나는 네게 작은 틈새가 되고 싶다
까맣게 하늘을 가린 여름 등나무 숲
그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다고 일러주는
나뭇잎 사이, 작은 틈새가 되고 싶다.
-시, <틈새> 모두
요즘 아이들은 왜 교사의 말에 감동하지 않는가? 지식에서 점수만을 취하고 감동을 지워버린 입시위주 교육이 그 주범일 테지만 이런 현상에 대하여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지쳐버린 우리 교사들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교사가 꿈꾸지 않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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