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별을 맞으러 들판으로 나가다

[무주이야기2] 반딧불이 없는 반딧불이 축제

등록 2005.06.15 17:31수정 2005.06.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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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백제가 통하는 문, 나제통문(羅濟通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을 가로지르는 암릉인 석견산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다. 무주구천동 33경 중 제1경인 나제통문은 이 석견산의 암벽을 뚫어 만든 높이 3m, 길이 10m의 작은 인공굴이다. 이 능선을 경계로 동쪽의 무풍은 신라 땅, 서쪽의 설천은 백제 땅이었다. ‘무주’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합쳐진 지금까지 두 지역의 언어, 풍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하니 참으로 질기디 질긴 것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요 관습인가 보다.


a 나제통문, 백제 땅

나제통문, 백제 땅 ⓒ 이승열


a 저 너머 신라 땅으로 국경을 넘다.

저 너머 신라 땅으로 국경을 넘다. ⓒ 이승열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점에 착안해 굴 양쪽에 검문소도 설치하고, 깃발도 세우고, 수문장 복장을 한 병사가 국경의 옛 분위기를 재현하며 설천의 유래와 나제통문 근처의 관광코스를 홍보하고 있었다. 천오백 년 전 국경이긴 하나 걸어서 넘는 국경이 감개무량하다. 오랫동안 고립돼 국경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해외와 외국이 같은 의미인줄 알고 살았었다. 나제통문(羅濟通門)의 유래를 담은 안내문이 구석에 세워져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뚫어 서로 왕래하던 문으로서, 우리 조상들의 통일에 대한 굳센 의지와 기상을 찾아볼 수 있는 무주구천동 제1경. 지금도 이 통문을 경계로 언어와 풍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a 나제통문. 통하는 문이라. 이름 한번 근사하다.

나제통문. 통하는 문이라. 이름 한번 근사하다. ⓒ 이승열

그러면 저 바위굴이 삼국시대부터 뚫려있었단 말인가? 중장비도 없었던 시절 정과 끌을 이용해 사람들의 손만으로 만든 굴이라니. 들쭉날쭉한 거친 바위의 표면이 수긍이 간다. 오랜만에 여행에 동행한 남편은 구조상 절대 삼국시대에 뚫린 게 아니라는 주장으로, 여행 내내 굴을 뚫은 시기가 궁금했다. 안내문 어디를 봐도 바위굴이 뚫린 시기는 적혀있지 않았다.

삼국시대부터 있던 굴이 아니란다. 일제 강점기 때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이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신속히 옮겨가기 위해 뚫은 신작로였다 한다. ‘기니미굴’로 불리던 것이 설천면의 이름을 따 ‘설천굴’ 무주구천동 33경을 정하며 이곳이 국경이었던 점에 착안해 나제통문으로 굳어졌다한다. 대학시절 나제통문 출신의 친구조차 나제통문이 삼국시대 때 생긴 것이라 자랑스레 설명했었다. 남편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삼국시대의 구조물로 생각하고 많은 이에게 그리 설명했을 것이다.

a 나제통문 입구의 강무경 의병장 동상. 갓도 쓰지 않은 상투차림이다.

나제통문 입구의 강무경 의병장 동상. 갓도 쓰지 않은 상투차림이다. ⓒ 이승열

왜곡된 것을 정확히 가르치지 않고 은근슬쩍 퍼트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일제 강점기 때 뚫었다 하여 양국의 국경이었던 역사적 사실이 퇴색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의미가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신라와 백제가 통하는 문이라! 나제통문이란 이름은 참 근사하다. 구한 말 가장 늦게까지 활동한 필묵장수 출신 의병장 강무경의 동상이 나제통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뙤약볕 아래 의병장을 기리는 화환이 놓여 있다.


세상의 별이 쏟아지던 칠흑 같던 무주의 밤, 반딧불이를 찾아 나서다

a 무주 땅 어디를 가든 감, 호두, 오디가 익고 있었다.

무주 땅 어디를 가든 감, 호두, 오디가 익고 있었다. ⓒ 이승열


a 길가 계곡 어디에 들러도 무주구천동의 맑은 물이 투명하다.

길가 계곡 어디에 들러도 무주구천동의 맑은 물이 투명하다. ⓒ 이승열


북한의 산수 갑산과 더불어 오지의 대명사로 꼽히는 무진장의 무주는 남한에서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청정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지자제 시행 후 어디를 가든 축제는 다 똑같다.


광경인 먹을거리 장터, 각설이 타령, 노래자랑, 떼거지로 몰려 사람들의 이미지로 굳어진 지역 축제에서 무주의 반딧불이 축제는 성공한 지역축제로 자리매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무주읍내에 들어서자마자 성급한 반딧불이 한마리가 차안으로 날아들었다. 아니 차안으로 반딧불이가 날아들 만큼 반딧불이의 세상인가? 기대, 또 기대하며 밤을 기다렸다.

a 향적봉 뒤로 지는 노을. 노을이 저리 붉으니 별이 얼마나 반짝일까?

향적봉 뒤로 지는 노을. 노을이 저리 붉으니 별이 얼마나 반짝일까? ⓒ 이승열

숙소 앞에서는 불빛 때문에 별들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조금 욕심을 내어 차로 1키로 밖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간간히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만 없다면 이곳 전체가 아니 우주 전체가 별로 둘러싸여있다. 자신 있게 찾을 수 있는 별자리 북두칠성이 어디 있는지 모를 만큼 세상의 별이 이곳에 다 모여 있다. 바닥에 누워 가슴으로 별을 맞는다. 희미하지만 은하수도 흐르고 있다. 이렇게 별이 많은 청정지역인데 그럼 반딧불이도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a 나를 찾아온 손님 반딧불이. 어린시절 봤던 반딧불이 보다 엄청 크다.

나를 찾아온 손님 반딧불이. 어린시절 봤던 반딧불이 보다 엄청 크다. ⓒ 이승열

잘못 저장된 기억이었던가? 어린 시절 형설지공의 고사를 떠올리며 반딧불이를 잡아 유리병에 넣고 뿌듯해 했던 것이 옥수수가 익던 한여름 밤이었는데 유월 초에 여는 반딧불이 축제라니. 하지만 낮에 무주 읍내를 빽빽이 메웠던 인파와 차 안에 날아 들어온 반딧불이를 생각하면 지금쯤 반딧불이가 날았던 것도 같기도 했다. 하나씩 잊고 기억해 낼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설천면 입구의 주유소까지 달려 직원에게 물어도 반딧불이 축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이왕 나선 길, 가다보니 벌써 무주 읍내에 닿았다. 남대천에 설치해 놓은 꼬마전구의 반짝임이 반딧불이 축제장이 맞긴 하다. 입구의 먹을거리 장터 상인에게 물으니 한참 전에 셔틀버스를 타고 반딧불이를 보러 어디론가 다 떠났단다. 어딘지 물었으나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다른 곳에 물으니 아까 시험관 안에서 양식한 반딧불이를 날렸는데 못 봤느냐고 하신다. 원래 반딧불이가 한참 활동을 하는 시기에는 농사일에 바빠 무주사람들이 참가 할 수 없어 미리 시기를 앞당겨 시험관에서 날리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설명이었다. 허무했다. 자신들의 축제인데도 제각각 말하는 상인들, 축제가 열리는지조차 모르는 주유소 직원. 성공한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반딧불이 축제마저 먹을거리 장터와 각설이 장단뿐인 축제였단 말인가. 결국 차안으로 찾아온 반딧불이를 빼고는 반딧불이를 한 마리도 대하지 못한 반딧불이 축제였다.

a 반딧불이 축제 현장에 농악이 빠진대서야. 예전에는 경운기로 요즘에는 트럭으로...

반딧불이 축제 현장에 농악이 빠진대서야. 예전에는 경운기로 요즘에는 트럭으로... ⓒ 이승열

집으로 돌아와 무주 반딧불이 축제의 게시판을 찾아보았다. 무질서와 무책임에 실망한 참가자들의 질책이 이어지고 다시는 무주를 찾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한번 실망한 사람들은 다시 그곳을 찾지 않는 법이다. 개발과 보존, 지역 수입의 증대 세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한 근시안적인 계획과 먹고 마시고 노는 것뿐인 축제는 청정 무주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시켜 결국 사람들이 찾지 않는 무주가 될 것이다.

반딧불이 축제, 고속도로 개통으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풍경이 변하는 덕유산 부근의 무분별한 개발, 반딧불이가 날지 않는 무주, 더 이상 별을 볼 수 없는 무주가 된다면 그것은 무주 사람들에게도 무주의 자연에게도 무주를 찾는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이다. 한여름 밤 작년처럼 여전히 반딧불이가 날고 쏟아지는 별을 맞으러 벌판으로 향하는 무주를 영원히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국경을 넘어 신라 땅으로 간 무주이야기3 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국경을 넘어 신라 땅으로 간 무주이야기3 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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