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심은 모로 가을에 햅쌀 떡 해 먹자"

우리 아이들의 모내기 체험

등록 2005.06.16 11:05수정 2005.06.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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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은 남이 복 받는 것을 보면 욕심을 내고 부러워하나, 제가 복 지을 때를 당하여서는 짓기를 게을리 하고 잠을 자나니, 이는 짓지 아니한 농사에 수확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나니라.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지 아니하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나니, 이것이 인과의 원칙이라, 어찌 농사에만 한 한 일이리요.<대종경 제 5 인과품 17장>

아이들과 수업 시간에 죄와 복에 관하여 얘기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과연 ‘내’가 복을 지으면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죄를 받는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아이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믿는다고 하자니 그 실상을 알 수 없고, 믿지 않는다고 하자니 그 실상이 있는 듯도 해서, 자신 있는 대답을 하지 못 하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또 말했습니다. “만약 자기가 지은 것에 대한 결과를, 짓고 난 후 바로 받아버린다면, 세상에 죄 지을 사람 없고, 복 짓지 않을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입니다. 모든 일은 그 일의 성질에 따라 시간이 걸립니다. 조만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복을 짓고도 시간이 지나야 복을 받고, 죄를 짓고도 시간이 걸려야 벌을 받으니,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것을 잊어버리고, 받는 것을 ‘재수’나 ‘운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현께서도, 복을 지어놓고 바로 복이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은, 이제 못자리 하여놓고 바로 쌀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 같다고 하신 것이라고 하니, 아이들은 알아 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골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a 농업 선생님이 모내기 방법을 시연하자 아이들이 진지하게 보고 있다.

농업 선생님이 모내기 방법을 시연하자 아이들이 진지하게 보고 있다. ⓒ 정일관

6월 들어 더워지는 날씨 속에 학교 주변 황정리 들판엔 보리 추수를 끝내고 들판 곳곳에 불을 놓더니, 로타리를 치고(써레질) 난 논들에 논물이 그득하였고, 이내 모내기를 하였습니다. 어느새 들판은 예쁘게 줄을 선 모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새 판을 짜 버렸습니다.

경남 합천의 원경고등학교 실습 논은 다른 논이 모내기를 다 끝날 때까지 비어 있었습니다. 2학년 학생들이 소록도 봉사활동을 떠나고, 1학년들은 문화체험활동을 떠나는 바람에 그 행사들이 다 끝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a 깜찍한 모내기 차림

깜찍한 모내기 차림 ⓒ 정일관

6월 15일 화요일, 오후 특별활동 시간을 겸하여 마침내 전교생의 모내기 행사를 벌였습니다. 교무실 칠판의 학교 행사란에 모내기가 적혀 있어 도시에서 온 아이들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였습니다만 매년 하는 모내기 행사라 어찌할 수가 없었고, 생전 처음으로 모내기에 참여하는 1학년 아이들은 호기심과 걱정 속에 엄살을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a 자외선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자외선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 정일관

날은 적절히 뜨거워 모내기하기에 좋았고, 아이들은 모두 반바지나 편한 바지를 입고, 수건을 두르고 나와 운동장 가에 있는 무대 위로 모두 모였습니다. 농업 선생님은 모를 가지고 와서 모를 뜯는 법, 모를 잡는 법, 그리고 모를 심는 법, 한 번에 심을 수 있는 모의 양과 간격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a 모내기 위치로 모판을 밀고 가며 배치하고 있다.

모내기 위치로 모판을 밀고 가며 배치하고 있다. ⓒ 정일관

이어서 실습 논으로 이동하여 학년별로 배정 받은 위치로 들어갔습니다. 모를 심는 아이들 뒤로 모를 날라 와 나누어주는 아이들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밟아보는 미끈미끈한 논바닥에 발이 들어가는 느낌이 이상하여 연신 소리를 질러댔고, 어색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는 모습은 영락없는 도시 촌놈들이었습니다.


a 줄 맞춰서 모를 심자

줄 맞춰서 모를 심자 ⓒ 정일관

맨 첫 줄에 맞추어 아이들이 모를 심는 모습은 가관이었습니다. 줄에 맞지도 않고 삐뚤삐뚤, 간격도 맞지 않게 듬성듬성, 바닥을 고르지 못해 들쭉날쭉, 선생님 한 분이 논두렁을 왔다 갔다 하며 소리를 질러대어 보지만 아이들의 손놀림은 느리고 답답해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a 도시 아이들의 모심기

도시 아이들의 모심기 ⓒ 정일관

그러나 한 줄 두 줄 심어나가는 못줄의 횟수가 늘어나니 일이 차차 손에 익숙해져 탄력이 붙는 것 같았습니다. 갈수록 아이들의 손놀림은 빨라졌고 한 시간 반이 지나면서 모내기는 끝이 났습니다. 모내기를 끝낸 아이들은 팔과 다리에 팩을 한 것처럼 진흙을 잔뜩 묻히고 나왔고, 균형을 잃은 한 여학생은 엉덩방아를 찧어 바지가 온통 젖기도 하였습니다.

a 잠시 허리를 펴고. 아이고 허리야!

잠시 허리를 펴고. 아이고 허리야! ⓒ 정일관

논 옆 배수로를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가 흙을 닦아내었고, 어떤 아이들은 평생 처음으로 모내기를 했다며 기념사진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행하는 또 한 가지 체험활동을 완수했다는 자부심을 안고 다시 무대로 모여 수박과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으며 뒤풀이를 하였습니다. 막걸리는 없었지만 아이스크림에 만족하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처음 해 보는 모내기가 어떠했냐고 말입니다.

a 이제 반쯤 심었나?

이제 반쯤 심었나? ⓒ 정일관

아이들은 하나 같이 논에 맨발로 들어갔을 때 느낌이 이상했다 하였고, 그렇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시인 농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는 1학년 정겨울 학생은 재미있었고, 이번 모내기 경험으로 농부님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a 노동의 아름다운 뒷모습

노동의 아름다운 뒷모습 ⓒ 정일관

이제 농약을 치지 않는 원경고등학교 벼들은 오직 자연과 아이들의 손으로 커나갈 것입니다. 가을날 메뚜기가 튀는 상상을 하며, 아이들에게 가을걷이하면 꼭 햅쌀로 떡 해먹자고 하니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이로써 아름다운 황정리 들판엔 어린 모들이 어설프지만 알차게 커서, 가을바람에 누런빛으로 일렁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침 산책 때 들판을 걸으며 이 모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도 벼가 익듯이 더불어 성숙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심었으니 거두는 것이고, 지었으니 받는 것이라는 인과의 이치를 모내기 경험으로 조금이나마 깨달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

a 모내기가 끝난 논에서 농부 아저씨같은 교장 선생님

모내기가 끝난 논에서 농부 아저씨같은 교장 선생님 ⓒ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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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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